22살, 군산 경찰서 후문의 경비초소에서 새벽 근무를 서며 <외딴방>을 읽었다. 그 이전에도 드문드문 책을 읽어왔었지만 <외딴방>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멀리서부터 서서히 밀려왔었다. 초소 밖의 푸르스름한 골목길을 한참을 바라보던 끝에 그 낯선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 이런 것을 문학이라고 하는구나.
그 후로 몇 번을 더 읽다 우연하게도 3년 터울마다 <외딴방>을 꺼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3년 주기로 이 책을 계속 읽어가며 내지 첫 장에 이 책을 읽은 나이와 장소가 차례대로 적어 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외딴방>은 내 삶의 나이테이자, 문학의 시작이다.
평소 책에 밑줄 이외에는 일절 메모를 하지 않는 나지만 이 책의 내지 한쪽에는 언제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메모가 하나 적혀 있다.
'이 책은 나에게 슬픔을 가르쳐 준다.'
여러 번 읽은 책이기에 다 아는 내용과 눈에 익은 문장들임에도 불구하고 <외딴방>은 여전히 나를 아프게 만든다. 외딴방은 어떤 곳인가.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천형처럼 짊어져' 있는 큰오빠의 외로운 기척이 있던 곳. '보잘것없는 삶을 살기 싫어'했던 외사촌도 동생들에게 큰 언니가 되기 위해 '철새처럼' 자기 희생의 삶을 선택해 떠났던 곳. '부스럼이 난 어린 남자공원이 비틀'거리며 '삶의 불안' 토해내던 곳. 예수 석고상을 만들던 문신을 한 연탄 가게 아저씨는 새벽에 끌려가 돌아오지 않아 노파 혼자 남겨진 곳. 그리고 '햇볕같이 표정 없이' 희미한 얼굴을 가진 희재 언니의 죽음이 있는 곳. 신경숙을 따라 외딴 방 앞에 가만히 서 있으면 그녀가 농도 짙게,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듯 건네는 슬픔에 절로 무릎이 꺾인다. 감정을 처음 배우는 존재가 '슬픔'을 알고 싶다고 하면 <외딴방>을 건네주리라.
그런 아픔을 잘 알면서도 <외딴방>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건 소설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문장 - '이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 소설은 자신에게 '희망이었고 절망'이었으며 '삶이었고 죽음'이었던, 외딴 방 그 자체인 희재 언니를 과거에서 끄집어내 더 이상 그녀를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기 위한 긴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는 말을 건넴으로써 이 소설은 완성된다. 신경숙은 말한다. 삶은 도저하다고, 그래서 인생은 전부를 주지도 다 가져가지도 않는다고. 너무 추워서, 너무 더워서, 너무 피곤해서 삶이 슬퍼지는 이 책은 그 슬픔 안에서도 여전히 작게 빛나는 사랑을 보여주어 다시금 삶을 사랑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든다.
올해 일곱 번째로 <외딴방>의 책장을 덮었다. 이 책을 읽을 때면 처음으로 <외딴방>을 다 읽고 한참을 바라보았던 창밖의 풍경이 떠오른다. 풍경 속 골목길 어느 안쪽에서는 여명과 함께 힘겹게 아침을 열고 있을 사람들이 있을 듯하다. 문정희 시인의 시처럼* 먹이를 건지기 위해 무릎을 꺾고 허리를 굽히면서 삶을 영위하거나 누군가를 책임지고 있을 그들의 손은 슬프고도 경건하다. 나를 키운 아버지의 손이 그러했고, 아버지가 되자 형의 손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외딴방>의 '나'는 자신의 발바닥을 찍은 쇠스랑이 있는 우물에서 끝내 쇠스랑을 끄집어 내고 별들을 담아둔다. 내가 앞으로도 <외딴방>을 계속 읽어 나가고 싶은 이유는 그런 손을 가진 이들의 우물에 나 역시 별 하나를 담아두고 싶기 때문이다. 이 도저한 삶을 사랑하고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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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율포의 기억’ 중에서
글, 사진 :: 임성현
Insta :: @always.n.all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