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제목의 노래가 있을 것만 같다. 다정함과 위트가 함께 느껴지는. 다만 반전인 것은 여기서 '너'는 人이 아닌 犬이라는 것. 나에게 너는 반려견인 코천이다. 기본적으로 온 몸에 털이 난 동물인 강아지는 피부 트러블이 잦다. 종의 특성도 있겠지만 환경적 특성도 무시 못해 여름에는 피부약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먹을 때는 간지러워하지 않지만 그 때 뿐이다. 트러블을 완화시키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완쾌의 개념은 날씨가 바뀌어야 가능하다)를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이빨과 뒷발을 사용해 몸을 자주 긁는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처지(자기 침대가 있지만 사용해버릇 하지 않아 늘 내 요에서 잔다)라 보고 있으면 안쓰러워 보호자인 나는 효자손?을 자처한다. 몇 번 손톱?의 맛을 보더니 시원한지 곧잘 내 옆에 와 턱을 치켜드는데 역시 모든 동물은 학습의 DNA를 갖고 있어 무섭다. 효자손은 혼자 긁지 못하는 간지러운 곳을 긁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인데 기다랗고 끝이 각진 무언가만 있다면 대체 가능하다. 이 도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내 등을 긁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을 것이다. 긁어줄 사람이 없었다면 간지러움의 고통을 참아야 했을까. 어쩌면 이 도구는 긁어줄 사람이 없어 고통에 몸부림치던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원래 모든 발명품은 필요한 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어쨌든 사람들은 이 도구로 인하여 사람의 손을 덜 필요하게 됨과 동시에 스스로도 등을 긁을 수 있는 자긁 능력을 획득한 것이리라. 편리한 물건은 어쩜 이렇게 자립(덜인간)지향적인지. 효자손이란 이름은 참 잘 지었지만 사람이 타인의 등을 긁어줄 일은 이제 상당히 드문 일이 되었다. 나 역시 등이 간지러울 땐 근처에 있는 30cm 자(괜찮아요, 나만 쓰니까)를 이용하곤 하니까. 그래서 코천이의 목이나 등을 긁어줄 때면 부모님 등도 안 긁어드리는데 하는 생각이 절로 나긴 한다. 스킨십의 효용에는 심리적 안정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고보면 내가 코천이를 긁어주는 것 같지만 나 역시 코천이의 체온으로부터 받는 것이 있는 것이다. 갸는 나한테 받으러 왔지만 나도 갸한테 받는 것이 있다는 것.(그래서 얘 표정이 이렇게 당당한가?) 긁어줄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너의 효자손이 되어줄게. 그리고 또 생각한다. 부모님께 효자되긴 그른 것 같지만 적어도 손으로 느껴지는 따뜻함은 잃지 말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