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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 Nov 15. 2024

광장과 밀실 사이에서

Sarıyer Merkez,  이스탄불 사람의 진짜 삶을 느끼고 싶다면

 장롱을 열어 두꺼운 패딩을 꺼냈다. 십일월, 부슬부슬 내리는 비. 흐리지만 이스탄불은 아직 그리 차갑지 않다. 사르예르 배 선착장엔 우리 가족만 우산을 쓰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이스탄불의 사람들은 모두 무채색 패딩을 입고 흩뿌리는 비를 온전히 맞고 있었다. 괜스레 서늘한 마음에 달력을 열어보니 겨울의 시작, '입동'이었다.


 십일월 십일, 일요일 선착장 근처.

아타튀르크 동상 앞 꽃이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그의 앞에 꽃을 올리고 기도를 했다. 튀르키예를 진심으로 사랑한 그는 서 있다. 그가 하늘로 떠난 날,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인근의 마트에 들어가 과일을 살핀다.

 

 "이 동네엔 그 우유가 아예 마트에 없어."


 남편은 내게 말했다. 동그랗고 검보랏빛의 알알이 들어있는 블루베리를 보는 나는, 우리 동네보다 싸다며 덥석 세 통을 집어 들었다. 아들이 잘 먹는 유리병에 담긴 우유가 이 매장에는 없다는 것을 알곤, 남편과 아이 그리고 나는 장보기를 마치고 바다로 돌아 나왔다.


 이스탄불의 조용한 배 선착장. 이곳 근처엔 이상하리만큼 한국적인 느낌이 나는 스타벅스가 있다. 매번 찾을 때마다 남편과 나는 타국의 카페에서 우리 동네에 있던 그곳의 느낌을 찾는다. 말만 튀르키예어만 바뀌었을 뿐, 조용히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고 2층에 올라가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아들에게 따뜻한 핫 초콜릿을 건넸다.


 "엄마, 맛없어."

 "알았다. 다음엔 안 사준다. 비싼 거다."


 남편과 나는 제 몫의 커피를 마시곤, 아들이 맛없다고 건넨 음료를 나누어 마셨다.



 한국에 살면서 나는 내가 어떤 공간에서 살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밀실이 가득한 한국에선 이 밀실이 가진 의미와 제대로 된 광장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교과서에 나온 연대표와 사건만을 외울 뿐,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빨갱이'라는 호칭이 싫어 해병대를 자원입대를 했다는 제주 출신 아저씨육지 사람은 못 느끼는 감정이라며 사람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술이 많이 취한 탓이었다. 그는 고향을 벗어나 사신지 꽤 지났건만 설움에 받쳐 해병 동기회라는 붉은 플래카드 아래에서 고래고래 군가를 불렀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아저씨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타국의 거리에서 현지인만이 가득한 동네의 주말.

 내가 사는 동네도 이스탄불이건만 외국인 흔해 나를 두 번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한적한 사르예르 선착장 앞, 바다를 향해 낚싯대를 던지는 그들 옆에 서서, 아들과 서 있는다. 무채색의 옷을 입은 그들은 낚시를 하는 그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들. 그리고 분명하게 이방인의 모습을 한 우리를 재차 다시 본다. 나는 그들과 생김새와 옷차림이 퍽 다르다. 이곳에 사 년째 살고 있지만 타국에서 온 사람이 된다.


 "난 그들에게 낯설구나."


 하늘에 갈매기가 낚시하는 아저씨를 넘어서, 저기 멀리 조업을 하는 배를 향해 날아간다. 아주 세찬 날갯짓이다. 아들은 나의 휴대폰을 받아 그 모습을 찍어본다.




 지금 우리 집엔 낯설게도 중국산 세탁기가 돌고 있다. 소음도 없고 세상 고요하다. 세탁기가 돌면 온 문을 꼭 닫던 이전과 달리, 화장실 문을 활짝 열고 글을 쓴다.

이스탄불의 전자제품 가게. 한국에서 흔했던 한국산 세탁기의 가격을 물으니, 한국에서 같은 세탁기를 두 개를 살 가격을 말했다. 결국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산에 눈이 간다. 이곳이 한국이라면 이 가격에 제법 좋은 한국산 세탁기를 하나 살 가격이다. 판매원은 내게 전자제품 수리를 위한 보험 제도를 이야기한다.


 "가전제품에 보험이라니. 이곳에선 세탁기가 정말 고급 제품이구나."


 타국에 사는 이방인이었던 나는 온전히, 이곳에서 사는 사람의 마음이 된다. 가전제품을 파는 직원은 '비싸다'는 나의 말에, 자신에게도 너무 비싸다며 씁쓸한 미소로 말했다. 한국에선 이 가격이라는 것이 퍽 놀라운 가보다. 고작 세탁기 하나를 타국에서 사면서 한국, 내가 살던 공간이 어떠했는지 인식한다. 어리석게도 타국에 와서야 내 공간이 어떠했는지를 알아간다.


 가전제품을 파는 튀르키예인, 그는 왜 이렇게 이것이 비싸야 하는지 알고 싶다며 외국인인 내게 이스탄불 살이의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온전히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내게,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없을 내게, 튀르키예 점원인 그는 씁쓸한 미소로 자문자답을 했다.


 "büyük ülke, büyük fiyat." 큰 나라 큰 가격!



이튿날.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한 사람의 손님을 잃어버린 채 물체처럼 빼곡히 들어찬 남중국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

흰 바다새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마스트에도, 그 언저리 바다에도.

아마, 마카오에서,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

- 광장, 최인훈 (1960)


 중립국을 선택하고 인도로 향하던 명준은 결국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진다. 1960년, 남한과 북한. 그 어떤 곳에도 이방인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쩌면 이제 자식이 있는 엄마인 나는, 그리고 휴일에도 가전제품을 팔아야 하는 튀르키예인 아버지인 그는, 서늘한 바람이 시작된 겨울의 시작에도 비가 오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건져 올려 자식을 먹여야 한다. 우리는 소설 속의 명준처럼 그렇게 삶을 포기할 수 없다. 허나 타고르호는 손님을 잃어버린 채 바다 속으로 무심히 사라진다.


 이스탄불 사르예르, 궂은 날씨 속에서도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배들은 조업을 하고 있었다. 어부들의 배를 향해 새끼를 깐 갈매기들은 정신없이 모여들었다. 낚싯대를 잡고 팔을 아래위로 올리는 튀르키예인 아저씨 옆에서, 흩뿌리는 비에서도 아들은 내 옆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흐리건만, 아들 덕분에 참으로 맑은 날이었다.


https://maps.app.goo.gl/D14qP6qM1JKaGHxr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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