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성찰]
어떤 인연은 물처럼 흐르고, 어떤 인연은 바람처럼 스쳐 간다. 때로는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힘을 주면 줄수록 더 멀어지기도 했고, 의도치 않게 멀어진 줄 알았던 사람이 문득 곁에서 미소 짓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관계는 늘 변하고, 사람들은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어릴 땐 함께 울고 웃었던 친구들이 평생 내 곁에 있을 줄 알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고, 사소한 농담에도 배를 잡고 웃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문득 깨닫는다. 언제부터인가 그 친구의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걸. 한때는 모든 고민을 털어놓았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멀어진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시간이 흘렀고, 각자의 삶이 바빠졌으며, 연락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반대로, 어릴 때는 멀게 느껴졌던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기도 한다. 부모님이 그랬다. 학창 시절엔 부모님의 걱정이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밥은 먹었냐”는 물음이 귀찮았고, “일찍 들어와라”는 말이 나를 속박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내가 부모가 되고 나서야 그 말들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아이가 밥을 먹지 않으면 속이 답답하고,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괜히 불안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리고 문득, 부모님이 내게 건넸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제야 알았다. 그저 걱정이었음을, 그 말들이 애정이었다는 걸.
그래서 요즘은 가끔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예전처럼 거창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는다. “잘 계시죠?” “별일 없으시죠?” 짧은 대화만 나누고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그 한 통의 전화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고 있음을 느낀다. 부모님은 전보다 더 자주 내게 먼저 안부를 물으신다. “애는 잘 크냐?” “아내는 별일 없고?” 예전 같으면 당연하게 넘겼을 질문이지만, 이제는 그 질문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까워진 사람은 부모님뿐만이 아니다. 아이의 어린이집 선생님, 동네 놀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는 부모들, 그리고 같은 시기를 겪고 있는 또래의 친구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나눈다. “요즘 애가 말을 안 듣네.” “잠은 잘 자?” “어린이집 보내고 나니까 좀 살 것 같아.” 사소한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를 건넨다. 예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갔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이들과의 짧은 대화가 삶의 작은 쉼표가 된다.
그러나 가까워지는 인연이 있는 만큼, 멀어지는 인연도 있다.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리고 가끔은 굳이 애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한때는 서로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지만, 이제는 이름조차 흐릿해졌다. 연락을 해볼까 싶다가도 ‘오랜만이라 어색하겠지’ 하고 넘어간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의 망설임이 쌓여 점점 더 멀어진다.
관계는 노력의 결과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운 흐름일까? 노력하면 붙잡을 수 있을까? 아니면 흐름에 맡겨야 할까? 오래 고민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붙잡는다고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잡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어떤 관계는 아무리 애를 써도 멀어지고, 어떤 관계는 아무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노력해서 유지되는 관계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관계가 노력으로만 유지되는 건 아니다. 때로는 흐름에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 억지로 붙잡으려 하면 더 멀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붙잡아야 할 사람과 그냥 흘려보내야 할 사람을 구분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기로 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새로운 인연을 맺거나, 떠나간 사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멀어진 인연을 아쉬워하기보다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한마디를 더 건네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그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