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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javenture Jan 17. 2016

2015년, '퇴사'라는 모험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그 네 번째 이야기


'지옥'으로 나서기 위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 만화 <미생> (윤태호)


2010년 말, 네팔 봉사단원 생활을 마치고 갑작스럽게 귀국한 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 좋지 않은 일들이었다. 이듬해 새해가 밝아 올 때쯤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1년의 임기를 겨우 두 달 남짓 남기고 중도귀국을 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고산병으로 스스로 하산을 결정하고 포기했던 에베레스트 칼라파타르와 달리, 봉사단 활동의 중도포기는 매우 후회스러운 결정이었다. 현지에서 나의 업무를 대신했던 단원 여동생 SH로부터 인터넷을 통해 네팔 소식을 전해 들으며, 동료 단원들은 물론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네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2011년 3월, 대학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다시 한국 생활에 적응해야 했고,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 네팔 생활의 기억들 역시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여느 대학생들처럼 학점 관리를 하면서 공인어학성적을 땄으며 최저임금 수준의 인턴을 하고 한 한기 동안 교환학생을 다녀오면서 흔히 말하는 '스펙'을 쌓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경험을 쌓으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었다. 본격적인 취업 시즌이 다가오자, 나 역시 수십 장의 자기소개서를 쓰고 수많은 기업에 원서를 넣으며 전전긍긍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채용공고를 보고, 자소서를 수정하고, 인적성 모의고사를 풀고, 공채 전공시험을 공부하던 그 시절이 지금 생각해도 참 즐겁지 않았던 것 같다. 로프 하나에 의지한 채 '취업'이란 정상을 향해 바들바들 떨며 올라가는 느낌. 다행히 졸업 전 좋은 소식들이 들려왔다. 대단한 직장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회사에 성공적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어릴 적부터 ‘모범생’이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했고, 괜찮은 대학교에 갔고, 누구보다도 알찬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요즘처럼 취직하기 힘든 시대에 내가 원하는 회사에 당당히 합격도 했다. 취직 안 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나는 심지어 가고 싶은 곳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자신감과 기대감, 뜨거운 열정으로 충만해있었다. 그렇게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동안 최선을 다해 일 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같은 직장에 있었던 그 누구에게도 당당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나는 '성실한 신입직원'이었다. 맡은 일을 '요구된 기한 안에 완벽하게 끝내는 것'은 나의 철칙이자 성향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서 거의 매일 야근을 했으며, 출퇴근뿐만 아니라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업무 생각만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업무량이 훨씬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적성에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맡은 일에 대해서는 모든 에너지를 퍼부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했겠지만, 나는 내가 원래 들어가고 싶었던 직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불타올랐었다. 그리고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 내 모습이, 꽤나 멋져 보일 때도 있었다. 취직 준비할 때 봤던 웹툰 <미생>의 '오 과장'처럼 말이다. 물론 힘들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조차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얼굴을 찌푸릴 정도로. 나와 달리 그는 야근수당이라도 받는다는 사실에 속상함을 숨기기 어려웠지만,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니까 이 정도 고생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1년을 몸이 부서져라 일 했다.

졸업 후 원했던 직장에 취직했지만 현실은 이상과 너무나 달랐다. / Hanoi, Vietnam (2014)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나는 조금씩 문제점들을 직면하기 시작했다. 나의 적성이나 노력 여부와는 별개로, 실제로 맞닥트린 직장생활이라는 것은 입사 전에 가졌던 기대와 포부를 산산이 부숴버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보여주기' 위주의 업무, 보고를 위한 보고, 끼워 맞추기식 성과, 이해할 수 없는 절차와 온갖 허례허식에 따라 일하는 사람들... 우리는 '성실함'으로 포장된 끔찍한 '비효율'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꿈꿔왔던 직장이었고 기대가 컸기 때문에 나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 내의 업무와 지시, 관행 등에 대한 불만이 늘어났다. 그중 일부는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는데, 나중에는 아예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해버리는 게 오히려 속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속상했던 것은 그런 것들이 우리 회사만의 문제점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한국의 거의 모든 직장에 내재(內在)된 원초적인 문제점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 혹은 '문화'의 범위까지 가야 하는 거시적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 OECD 회원국 34개국 중 노동시간 1위, 생산성 28위(2014년도 기준)라는 부끄러운 통계는 순위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인데 한 사람이 하고, 그 한 사람의 장시간 노동을 당연시하는 인식이 만연했다. 정당한 대우 없이 '책임'과 '희생'만을 논하는 분위기에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에 대해,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그냥 일개미처럼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손 쓸 도리가 없다는 사실에 나는 깊이 좌절했다.

성실하기 그지 없는 한 마리 '개미'가 되어버린 나 (https://en.wikipedia.org/wiki/Ant)


맡은 업무에 대한 책임감은 변하지 않았지만, 일과 회사에 대한 애정은 급격히 사라졌다. 아무도 내게 남아서 야근하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귀가하지 못 했다.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자정까지 붙잡고 있는 날이 계속 이어졌다. 특유의 꼼꼼한 성격과 강한 책임감은 스스로를 더욱 힘들게만 할 뿐이었다. 너무나 지칠 때는 회사 옥상에 올라가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고는 했다. 우울했다. 열심히 살아왔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눈 판 적 없이 성실하게 살아왔던 나였다. 고등학교 때는 수능을 잘 보면 좋은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했고, 좋은 대학을 가면 좋은 직장을 얻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좋은 직장을 가면 괜찮은 삶을 살 수 있고 어느 정도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뭐든지 노력하면 잘 될 거라고 믿었다. 꿈꿔왔던 직장, 겉으로 멋지고 좋은 일을 하는 직장이 꼭 '좋은 직장'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2년이 지나고 남은 것은 여유도, 미소도, 자신감도, 그리고 '자신'마저 잃어버린, 밤 9시 반의 마지막 퇴근버스 타는 것을 '칼퇴'라고 생각하는 업무의 노예뿐이었다. 나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끝없는 일을 위해, 내 '노력'과 '열정'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를 갈아 넣고 있었던 것이다.


삶에 대한 혼란과 우울함. 무수한 야근 시간만큼 했던 수많은 고민들. 고백하건대 힘들게 들어온 직장이었던 만큼, 퇴사는 에베레스트 트레킹과 비교도 안 되는 내 생애 가장 큰 '모험'이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끊임없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리고 사실 퇴사를 감행할 때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나 스스로를 모두 소진(burnout)해버린 상태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잃고 있는 자신을 찾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은 명확했다. 이제껏 전쟁처럼 살아온 삶에 잠시 쉼표를 찍고 다른 미래를 그려보고 싶었다. 인계인수서를 작성한다고 끝까지 정신없었던 마지막 근무를 끝으로, 나는 20대의 절반 동안 꿈꾸고, 사랑했으며, 자랑스럽게 일했던 회사를 퇴사했다.


평소라면 사무실에서 엑셀을 붙잡고 있었을 다음날 아침 10시, 나는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초여름 햇살이 비추는 집 근처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마음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 길로 혼자 코엑스에 가서 봤던 영화 <어벤져스2>와 서점에서 들춰보던 <지지 않는 청춘>이라는 책, 모두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렇게 나는 '백수'가 되었다.

짧게 끝난 첫 직장생활이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고 나름의 소중한 추억들도 있었다. 부디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5)>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연재 순서

프롤로그 : 용사의 탄생

제 1편. 네팔과의 첫 인연 : '달밭킬러'가 된 해외봉사단원

제 2편. 히말라야 트레킹 도전기 : 에베레스트와 고추장아찌

제 3편. 헤어짐의 '너머스떼(नमस्ते)'

제 4편. 2015년, '퇴사'라는 모험

제 5편. 백수에서 '용사'로 : 극한의 알프스

제 6편.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의 탄생

 7편. 사막마라톤 훈련기 : 양재천에서 천왕봉까지

 8편.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리는 청년'이 되기 위해

 9편. 사막마라톤 전초전 : 바람의 땅 남미 파타고니아

 10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죽음의 계곡

 11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악마의 발톱

제 12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소금달의 별빛

제 13편. 사막마라톤 그 후 : 다시 '너머스떼(नमस्ते)'

에필로그 : 끝나지 않은 레이스





 <용사의 탄생>의 '서브 연재물'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시리즈 2010년도 해외봉사단원으로 네팔에서 활동했던 제가, 2015년 직장 퇴사 후 네팔 지진 피해 지원 후원금 마련을 위해 칠레 아타카마 사막마라톤에 도전한 소셜펀딩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지난 이야기들을 구경해보세요.   

https://www.facebook.com/imgoing2nepal


 2015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진솔한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 먼저 확인해보세요.     https://youtu.be/ntiof25ZOrM

#I'M GOING TO NEPAL [아름다운 청년X아름다운커피]'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의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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