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나를 다독이는 주문
엄청난 주제를 가지고, 대단한 필력으로 이 글을 쓰지 못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일상을 살고 있고, 내 인생에서 사건이라고 할 만한 일들은 그 누군가에게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그저 나는, 마주하고 싶었다.
서른의 끝 무렵. 내가 나와 마주하고 싶었다. 한 번쯤은 말이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냈고, 나는 어느새 마흔이라는 나이를 바라보고 있고, 어릴 적 꿈꾸던 멋진 어른은 되지 못했다.
여전히 눈물 마를 날 없는, 서른아홉 일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눈물이 나는 순간에 나는 이 노래를 혼자 되뇌어 부르곤 했다.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1973년작, 일본 만화 ‘개구리 왕눈이’ 주제가의 한 소절이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태어난 개구리 왕눈이를, 나는 무척 좋아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전유물이었던 안방 텔레비전 앞에 코를 박고 보았던 그때 그 시절 만화영화.
어느 누구도 할아버지의 채널을 돌리지 못했던 그때. 나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만화영화 타임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할아버지 뉴스 보시잖아, 이리 나와’라고 엄마가 말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앞에 앉은 손녀의 갈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만화가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셨다.
낡은 텔레비전의 채널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
아침밥을 차리던 할머니와 엄마의 소란스러운 부엌 소리, 그리고 갓 지은 밥 냄새.
만화가 시작될 때, 물끄러미 자리를 비켜 주시며 머리를 토닥여 주던 할아버지의 투박한 손길,
삼십여 년이 훨씬 지난 그 순간이 나는 왜 이토록 생생한지 모르겠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리운 것들이 가득 담겨서인지,
아니면 아이들이 보기에도 너무 슬펐던 ‘개구리 왕눈이’ 만화 때문 이었는지,
나는 ‘개구리 왕눈이’ 주제가가 너무 슬프다.
그리고 버릇처럼, 혼자 울어야 하는 어느 날엔, 꼭 이 노래가 떠 오른다. 마치 볼록한 브라운관을 통해 봤던 만화 영화 그대로 생생하게 생각난다.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라니…
내겐 너무 멋진 위로였다.
그리고. 다시 갈 수 없는 그리운 것들을 떠올려 내 슬픔을 다독이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누군가,
울고 있는 내게,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라고 말해주는 상상을 한다.
그 말을 듣는다면, 내 슬픔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흐르는 눈물을 서둘러 닦아내고, 그 말을 해 주는 사람을 향해 힘껏 웃어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날에, 혼자 울음을 삼켜야 하는 날에,
속으로 흥얼거리곤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토닥이곤 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그 겨울에서 봄까지.
떠난 그들과, 떠나보내지 못한 나의 깊은 우울과 상실감을 나는 한 자 한 자 적어나갔다.
많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쏟아내기만 했다.
그러다, ‘나는 왜 이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거지?’라는 물음 앞에 한동안 멈춰 생각했다.
이 글들은, 내 또 다른 울음이었다.
토해내듯 적어 나가는 이 울음 같은 글들에,
“네가 울면 무지가 연못에 비가 온단다.”라고 얘기해, 그 울음을 멈추고 싶었다.
누군가의 울음도, 그렇게 멈추기를…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러니, 당신 울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