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 국화

시&에세이

by 여상


[가을 국화]


가을빛 담긴

몸매무새

겸손히 감싼단들

이 향기 어찌할까


갈바람 낯익은 향기에

문득 걸음 멈춘 이

노랗게 꺼내어 보는

해묵은 그리움


다 지고 가거늘, 국화야

찬 새벽 잊지 않고

홀로 와주나니

네 외로움 내겐

무엇 더할 위안이랴


하얀 달빛 동그란 꽃망울

기억 한 켠에 묻어둔

얼굴 얼굴들

감추려 해도

빛나는 것들이 있는 게지


가을은 또 가고

흩뿌려진 기억들

남은 마음일랑

떨어지는 꽃잎에

슬며시

얹어 보내야겠지





essay

며칠 몸을 풀더니 국화가 만발하게 피었다.


화단이랄 것도 없는 마당 가장자리에는 내가 심어놓은 허브들과 산에서 옮겨 심은 산곰취, 머위, 몇 가지 들꽃들이 있고, 몇 년 전 주인 아주머니가 심어 놓은 국화 몇 무리가 함께 자란다. 가을이 깊어가면 화단 한쪽이 갈색으로 시들어 가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색깔도 모양도 다양한 국화들이 차례로 피어나 초라했던 마당 언저리를 화사하게 채워준다. 덩달아 큰 돌로 엮어 쌓은 축대 담벼락에는 산국도 함께 피어나, 꽃향기가 그윽한 마당은 봄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생기가 넘친다.


여름내 볼품 없이 줄기와 이파리를 키우던 국화초는 봄 여름꽃이 피었다 모두 지고, 나뭇잎이 마르기 시작한 후에야 꽃을 내어 놓는다. 사람들 떠나 찬바람 도는 허전한 집에 늦게서야 도착한 뜻밖의 손님처럼...


반가운 마음에 마중을 나가 보면 손 흔들며 노랗게 다가오는 얼굴도 있고,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수줍게 볼 붉히는 얼굴도 있다.



며칠 내리던 부슬비가 멈추고, 구름을 걷어낸 하늘이 온통 푸르게 빛을 내는 가을날의 오후, 선선해진 바람을 타고 전해오는 꽃향기에 이끌려 살랑대는 꽃망울 앞에 선다. 그 동그란 얼굴들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눌러 두었던 추억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국화 향기에 실려 슬그머니 배어 나온다.

단아한 자태에 어여쁜 새소리가 얹혀 지고, 계곡에서 내려온 맑디 맑은 냇물 소리도 더해 지고...


유난스럽지 않은 감정은 그냥 흘러가게 두어도 괜찮다.





나이가 들면 보내는 것들이 많아진다.

그러나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다.

뒤늦게 오는 것들은 그들조차 외로워 보여, 조용히 안아 다독이고 싶어진다.

그래, 이렇게 외로운 것들끼리 서로 의지해 마음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

보낼 것은 허심탄회하게 놓아 주고, 내게 새로이 다가오는 조촐한 것들과 따뜻하게 찻잔을 데워 들고 마주 앉는 것.


날이 좋으니 오늘 밤 달도 밝겠네.

이 가을이 내게 위로를 주고 있다. 서늘하고 선명한 위로이다.


바위 틈 산국도 덩달아 피었다.





#가을 #국화 #그리움 #위로

keyword
이전 02화빈 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