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없는 나의 겨울은

bgm : blah - 널 더

by 민서


눈이 없는 겨울은 내가 사랑하는 그 겨울이 못 된다. 눈이 없는 겨울은 내게 그저 빈 껍데기뿐인 계절처럼 느껴지곤 했으니까. 눈이 내릴 때면, 항상 기분이 좋았다. 세상은 무채색인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알록달록, 휘황찬란했다. 그런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일 때면,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눈이 아닌 모든 것들은 잠시 멈춘 것처럼 보였다. 쌓인 눈 아래로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눈이 내리는 것보다, 눈이 쌓이는 걸 좋아했다. 고로 나는 비가 아닌 눈을 사랑했다. 비는 뭐랄까. 내리면 내릴수록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더 진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눈은 얼어있다는 이유로 세상의 모든 색깔을 하얗게 감싸 안으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추운 겨울, 얼어붙은 창문을 조금 열고 작은 틈새로 구경하는 바깥세상은 내가 알던 그 세상이 아니었다. 가만히 눈이 쌓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속을 누가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찾았다. 눈이 좋은 이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한다는데. 나는 그러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아프다고 내뱉으면 간신히 버티고 있던 순간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마치 따듯한 햇살에 조금씩 녹아내리다 털썩 주저앉고 마는 눈사람처럼 말이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을 꾹 다물고 입술을 꽉 짓누르고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는 것. 알록달록 날이 선 감정 위로 하얀 눈을 살포시 덮는 것. 나는 마음이 차가워질 땐, 일부러 눈을 내린다. 마음이 따듯해지면 서서히 녹은 눈들이 짙은 상처를 서서히 보여 줄 터이니.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내가 원치 않는 말을 뱉고, 참았던 감정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던 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만큼, 한없이 약해져 있었던 날. 마음에 차가운 눈을 내리기도 힘에 부치는 날이었다. 세수를 하고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바르면서 연신 얼굴을 두드렸다. 눈물아 제발 들어가라. 지금 울 때가 아니다. 정신을 좀 차려봐라. 그렇게 열심히 두드렸음에도 빨개지는 건 볼이 아닌 눈시울이었다. 두 볼 위로 자꾸 눈물이 흘렀다. 남자친구가 잠깐 집에 들르기로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였다간 정말 창피할 것 같았다. 그때, ‘띠리릭’ 현관문이 열리고야 말았다. 망했다. 다급히 작은 눈으로 잽싸게 요리조리 그의 눈을 피하며, 슬프지 않은 척을 해댔다. 하지만 멍청한 나는 남자친구에게 등을 돌린 채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야 말았다. 평소 눈치가 없다는 남자친구도 알아차릴 만큼 나의 행동은 굉장히 아주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늦은 밤, 오늘 하루 지쳤을 나를 위해 달려와 준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이유도 말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등을 돌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팡! 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 오빠 얼굴 보면 눈물 날 것 같아.’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아니야, 나는 민서 등만 보고 있어도 너무 좋아.’


라고 말했다. 애써 안 울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등만 보고 있어도 좋다니... 오빠는 내 눈물샘을 터트리려고 작정을 한 게 분명했다. 안돼. 안돼, 참아.

그렇게 그날, 그는 나의 등만 보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 등에 그의 손으로 열심히 하트를 그리고 난 다음, 토닥토닥 두드려주곤 그렇게 돌아갔다. 왜 우는지, 왜 속상한지, 왜 말할 수 없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가 내게 해준 배려는 고요한 침묵이었다. 그는 나를 대신해, 내 맘속에 하얀 눈을 내려줬다. 고요한 사랑이 쌓인 맘 위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나갔다. 눈이 없는 나의 겨울은 그렇게 조금은 따듯하게 지나갔다.




*


눈이 왔다. 눈이 온 지 몰랐다. 그는 눈이 왔다며 졸린 눈을 비비는 내게 신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눈? 눈이 없어도 좋다. 눈이 없어도 눈처럼 새하얀 마음을 가진 그가 내 옆에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 우리는 눈이 오면 가슴에 팥 붕어빵 2마리, 슈크림 붕어빵 2마리를 낚아채 집까지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하얗게 내려 반짝이는 눈보다 더 반짝이는 소중한 두 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따듯한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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