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지원 Jul 23. 2024

'딸과 함께'라는 고난도의 수련

요가반에서 만난 '딸의 딸'을 키우는 그녀

 7월엔 화수목금 4일로 요가 수련시간을 늘렸다. 이유가 있다. 

몸과 마음의 수련이 아주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대학교 기숙사에 있던 큰 애가 7월 8월 두 달간 집에 와서 

공부를 하겠다고 한다. 취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모양이다. 올해도 도전하는 시험이 있고, 내년에도 있으니 아이는 마음이 초조할 것이다. 밥도 잘 챙겨주고 가능하면 심기도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내가 열심히 수련해야 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마음이 종종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달린다. 

기질이 느린 큰 애와 재빠른 난, 어쩔 수 없는 불협화음이다.  

아이가 한창 예뻐지고 있다. 가끔 실감하며 깜짝 놀란다. 


"으잉? 너 왜 이렇게 이뻐졌냐?"

"진짜?"


머리카락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피부도 확실히 달라졌다. 여드름 흉터가 꽤 있었던 거 같은데, 다 어디 갔지? 저렇게 예쁠 때 연애, 놀기, 일하기 다 해봐야 할 거 같은데, 매일 공부하며 엄마 밥을 먹고 있으니 즐겁진 않을 것이다. 20대의 나도 방송작가 교육원을 다니며 지지리 궁상을 떨었던 시기가 있다. 

그 기분이 뭔지 조금은 알 거 같다. 하지만 극적으로 취업이 되고! 좋아 죽겠다고 난리 법석을 떨어도 

곧 다시 힘든 시기가 찾아오는 인생의 굴레(?)를 생각하면 지금 저렇게 공부하고 밥 먹는 단순한 삶도 즐길 법 한 건데... 그러긴 쉽지 않을 것이다. 주방에서 레몬을 짜고 있는데 아이가 날 빤히 본다.  


"엄마, 나 공부할 때 말이야... 내 뇌를 저 레몬처럼 짜고 있는 기분이 들어."  


 아마도 수학 관련 공부를 말하는 것일 거다. 대학 들어가고 제일 좋은 게 수학 안 하는 거라고 했었는데, 

아이는 결국 돌고 돌아 수학과 만났다. 

오전 9시 5분 전이면 우리는 함께 집을 나선다. 아이는 스터디카페로 나는 아파트 커뮤니티 안에 있는 

짐룸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예전과는 다르게 붐비는 느낌이다. 7월이 되며 팔목 부상으로 한동안 오지 못했던 같은 동 9층 언니가 복귀했고, 새로운 수강생도 두 명이나 늘었다! 얼굴이 뽀얀 대학생과 얼핏 삼십대로 보이는 주부인데,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엄마라는 걸 보면 사십 대 일 수도 있겠다. 요즘은 외모로 나이를 가늠하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항상 일찍 오셔서 짐룸 맨 안쪽에 자리 잡는 또 다른 왕언니가 보인다. 중저음의 말투와 허리춤까지 내려온 긴 머리... 60대인 그녀는 우아하고, 차분해 보인다. 이제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되니 그녀는 

잠시 요가를 그만둘 것이다. 그녀는 '딸의 초등학생 딸'을 돌보고 있다.  

방학에는 아이들이 오전에도 집에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빨리 딸 네 집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딸이 출근을 할 수 있으니까.  


"난 아이를 돌보는 게 참 좋아요, 힘들기보다 리프레쉬되는 느낌이 들어요."


스승의 날 즈음, 리치(rich)한 왕 언니가 우리를 빵집에 데려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함께 나눈 대화 중 그녀가 했던 말이다. 난 '리프레쉬'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딸의 딸을 돌보는 일과 '리프레쉬'라... 이게 어울린다고?  

자고로 리프레쉬는 여행, 휴식 이런 것과 짝꿍이 아니었나?   


"우리 손녀가 태권도 품띠를 땄는데, 요즘 태권도 품띠는 아주 근사해!"


사진을 보여주시는데, 태권도 품띠 인증서가 거의 무궁화 훈장급으로 화려하다. 

초를 꽂은 케이크 그리고 인증서를 손에 들고 웃고 있는 손녀의 얼굴이 보인다. 

휴대폰 속 사진을 나에게 들이미는 그녀의 얼굴도 행복해 보인다. 

정말 '리프레쉬' 맞나 보다. 갑자기 궁금했다. 내 딸의 딸을 돌보는 기분은 어떤 걸까? 


"요즘 큰 애가 집에 와 있어서 밥 해주는 것도 힘들고, 이래저래 신경 쓸 일도 많고... 힘들어요."

"그럼 힘들지... 그래도 해줘야지. 난 딸이 둘인데, 딸 키우는 게 참 좋았어요.

 

딸 키우는 게 '참 좋았다'는 그녀의 말이 강렬하게 내 마음에 남았다. 


집에 돌아오니 식탁은 네 식구 아침 먹은 흔적으로 엉망이고, 각 방마다 벗어놓은 옷가지며 

여기저기 놓인 수건들... 뭐 하나 제자리에 놓인 게 없는 거실 풍경이 나를 맞이한다. 

힘을 내야 하는 순간이다. 12시 반이면 딸은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올 것이다. 

뇌를 레몬처럼 짜고 있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럴 땐 매운 음식, 튀긴 음식이 아주 명약이다. 오늘 점심은 떡볶이랑 야채튀김으로 정했다.  

냉동실에 넣어둔 가래떡을 꺼내놓는 것이 급선무. 가래떡이 해동되는 동안 나는 청소와 정리를 할 것이다. 

잎이 꺾인 화초엔 물도 주고, 구구절절 나열하기도 민망한 그저 그런 집안일을 엄청난 속도로 해치울 것이다. 요가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다스렸고, '딸의 딸'을 돌보는 우아한 그녀를 바라보며 내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환청 같은 걸 들은 거 같기도 하다.  


"힘들어도... 딸을 사랑하라~~ 사... 사랑하라~~~~ 

 너를 기억하고, 너의 마지막 순간에 눈물을 흘려주고, 손을 흔들어줄 소중한 사람이란다... "   


 청소기를 돌리다가 거울 앞에 섰다. 평생 바라본 내 모습인데,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청소기를 옆에 세워두고 팔을 들어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전완근이 꿈틀꿈틀 한다. 하이플랭크 자세에서 

차투랑가 단다 아사나로 내려가는 동작(일명 푸시업)을 하며 팔 근육이 단련된 모양이다.  

몸을 돌려 종아리 근육을 본다. 뭔가 있다. 늘 최선을 다한 요가 수련과 그간 매진한 실내 자전거 타기의 

결과일 것이다. 솔직히 중년 아줌마의 태가 확실히 나긴 난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뿌듯하다. 

청소와 정리를 끝내고 주방으로 가보니 가래떡이 담긴 지퍼락 봉지에 이슬이 맺혀 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떡볶이 소스를 꺼냈다. 개량한 물을 냄비에 담고 소스를 풀고 떡을 한입 크기로 잘라 넣고 끓인다. 감자와 당근은 껍질을 벗겨 채칼에 슥슥 밀어주고, 양파는 칼로 썬다. 튀김가루를 뿌려 꾸덕꾸덕해지게 섞고 물을 조금씩 부어 적절한 농도를 맞춘다. 기름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한 덩이씩 만들어 기름에 살짝 띄워준다. 카톡이 온다. 딸이 온다고 한다. 그래 빨리 와 같이 점심 먹자! 

딸과 이럴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 


아차차 좀 있으면 중1 막내딸이 검은 아우라를 내뿜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요즘 사춘기 발작 증세(일명 문어루이 14세!)는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아직은 확실히 사춘기다. 아니, 왜 가방 메고 학교 갈 때 꼭 성질을 부리는 건가? 

어떤 날은 앞 머리의 컬이 마음에 안 들고, 어떤 날은 양말 색깔이 마음이 안 든다. 

집에서 학교까지 놀면서 걸어가도 10분이 안 걸리는데 8시 50분까지 등교면 40분에 나가도 충분하지 않나?

왜 25분에 나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지? 아침밥은 분명 웃으며 먹었는데... 그 마음 진짜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야. 하여간 모든 게 못마땅하다는 듯 끝내 성질을 부리곤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아이를 보면, 가슴에 돌덩이 하나가 날아와 콱! 박히는 느낌이다. 한숨이 나오며 그 돌덩이가 머리 위로 솟구친다. 

관자놀이가 요동치며 눈가가 저릿저릿... 이윽고 뜨거운 눈물이 레이저 빔 쏘듯 터져 나온다. 


"으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쟤 왜 저려냐?"    

"엄마, 잠깐 진정하고... 나 요즘 너무 힘들 때 잠깐씩 보는 넷플릭스 시리즈가 있는데.. 틀어줄까?"

"뭔데?"

"성난 사람들이라고... 원제는 BEEF."

"그래... 한번 틀어봐."


다들 성나있군,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나도 언젠가... 우리 요가반의 그녀처럼 평온하고 우아한 말투로 딸 키우는 게 참! 좋았어요,라고 

누군가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물론 지금도 그렇게 최악은 아니야, 아닐 거야! 



딸과 함께 한 점심






















                     

이전 10화 샴페인의 주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