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가 좋아지는 나이가 됐다
상추 쌈밥을 먹으며 엄마의 유전자를 느낀다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확신하고 살아왔다. 성당 주일학교 교사 시절 “아버지와 똑같네요.”라고 한 지인의 말이 확신의 뿌리였다. 아버지와 일하는 방식이 닮았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말이 칭찬으로 들려 확신이 더해졌다. 덧 붙여 작은 키에 빠른 말씨, 급한 성격, 추진력까지 모든 것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지표로 이해했다.
얼마 전부터 확신에 수정을 가할 일이 생겼다. 엄마의 유전자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 몸의 50%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은 상추였다. 정확히는 상추 쌈밥이 꿀떡꿀떡 넘어가는 몸의 반응을 접하면서였다.
농장을 하는 친구로부터 샐러드용 야채를 간간히 건네받았다.
야채를 듬성듬성 자르고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섞으라는 레시피까지 받았지만 내 토속적인 입맛은 샐러드에 익숙하지 않았다. 최근 고지혈증 진단을 받고 식사를 개선하라는 처방까지 받았던 터라 야채를 먹을까 말까 하는 기로에 서 있을 형편은 아니었다.
야채식이 필수가 되어버린 마당이지만 입맛까지 무시할 수는 없기에 고전적인 방법으로 상추에 케일 한 장을 얹고 밥 한 숟가락, 쌈장을 살짝 넣고 먹어 보았다. 아무 맛도 없어 보일 것 같은 상추쌈이 저항감 없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수북하게 쌓인 상추를 다 넘길 때까지 아삭하게 씹히는 맛이 순하디 순했다.
나에게 상추는 혼자로는 존재감이 없는 식재료였다. 고기를 먹을 때 따라오는 부재료일 뿐이다. 고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상추, 그 상추를 엄마는 밥만 싸서 드시곤 했다. 상추 앞에서 깨작깨작 젓가락질하던 나는 고기 없이 상추쌈만 먹는 엄마 입맛이 이해가 안 됐다. 고기가 귀했다는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앙꼬 없는 찐빵처럼 보였던 고기 빠진 상추를 이제는 나도 먹고 있다. 상추의 새로운 발견이다. 어쩌면 상추의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상추는 플러스가 넉넉한 식재료다. 고기를 함께 먹는 것이 완벽한 조합이라 생각했던 고정관념에서 한 발 물러나 보니 고기를 대체할 것이 넘쳐났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상추와의 조합에서 부족하지 않았다.
상추 쌈밥은 상추 위에 밥 한 숟가락 얹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위에 냉장고에서 쉬고 있는 밑반찬이나 밥반찬, 냉동실 한편에 자리 잡은 견과류를 한두 개 얹으면 된다. 그리고 된장과 고추장, 메실엑기스만을 섞어 만든 쌈장을 살짝 올리면 쌈밥이 마무리된다. 마늘과 고추가 덤이 되기도 한다.
상추 외에 크게 준비할 게 없다는 게 상추 쌈밥의 매력이다. 이런저런 반찬이 들어가 제법 큼지막해진 상추 쌈밥을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베어 물면 쌈밥 안의 반찬들이 툭툭 떨어지기도 한다. 성큼 손이 가지 않는 잔멸치 볶음도 쌈밥 안에서는 언제나 환영받는다. 김치 한 젓가락과 아몬드 한 조각, 감자채 볶음의 상추 쌈밥 조합도 훌륭하다. 아삭 거리는 김치와 탁 탁 씹히는 아몬드의 고소함, 말캉거리며 씹히는 감자의 부드러움이 조화롭게 입안에서 섞인다. 김치와 잔멸치 조합에서는 초등학교 때의 도시락 맛이 난다.
어떤 반찬을 상추 안에 집어넣어도 상추 특유의 신선함과 깨끗한 맛을 잃지 않는다. 상추는 찬밥도, 며칠 묵은 반찬들도 기꺼이 품어서 수수하게 목구멍으로 넘겨 한 끼 식사를 여유롭게 해결해준다.
상추가 좋아지면서 엄마를 닮았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몸의 절반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이제야 서서히 존재감을 발휘하는 스타일이 역시 엄마다. ‘아 엄마는 유전자도 이렇게 지혜롭구나.’ 새삼 감탄한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유전자 시대였다면 이제부턴 엄마의 유전자 시대이다.
엄마는 4대가 함께 사는 집의 큰 며느리였다. 시집와서 보니 돈 버는 사람은 ‘네 아버지뿐이었다’는 엄마의 회상에는 시누이, 시동생을 포함해 10명이 넘는 대가족의 밥을 책임져야 하는 고단함이 묻어 있었다. 팔순이 넘는 할머니를 모시고 있을 때는 수시로 할머니를 보러 오는 아버지 형제들 밥을 위해 늘 전기밥솥의 불이 켜져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도 올해 구순을 맞으신 아버지의 세끼 밥을 오래도록 해 내셨다.
‘엄마는 상추 쌈밥을 맛있게 드시는 분이셨다.’는 기억엔 왜곡이 없다. 그러다 문득 엄마는 때때로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넘기기 위해 상추쌉밥을 드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늘 빡빡한 살림과 고단한 삶에서 순하게 밥을 넘겨주는 상추 쌈밥의 온순함이 엄마를 쉬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정년을 하시고 집안 경제를 맡으셔야 했던 어려운 시절에도 늦은 저녁 상추 쌈밥을 꼭꼭 씹어 드셨을지도 모른다. 밥맛이 없을 때 상추를 꺼내 이것저것 반찬을 넣어 한 입에 터져라 욱여넣고 빡 빡 씹을 때면 ‘엄마도 이렇게 밥을 먹고 힘든 일상을 견뎌냈겠구나’ 싶다.
순하디. 순한 상추를 드시던 엄마는 이제는 매끼 밥을 몇 숟가락밖에 못 드신다. 안부 전화를 하면 늘 마지막엔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으신다. ‘전화하기를 잘했구나’ 싶게 마음을 순하게 풀어주는 말이다. 기꺼이 들어주고 몇 마디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엄마의 유전자는 순하디 순한 상추의 맛을 닮았다.
화살 쏘듯 말을 건네고 나에게 실망해 풀이 죽어 있을 때 상추 쌈밥을 먹는다. 내 안에 있을 엄마의 말씨 유전자를 기다리면 된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입을 벌린다. 앞으로 내 안에서 피어 나올 엄마의 또 다른 유전자들도 궁금해진다. 삶의 기대 수준이 올라간다.
상추를 좋아한다고 여기저기 이야기하고 다닌다. 텃밭이 있는 이들이라면 의례히 상추는 당연 작물이다. 역시나 순하고 고요한 말씨의 사람들이 건네는 상추를 받아먹으며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엄마의 고운 말씨 유전자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