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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우울하던 날 찾아온 아래층의 내편

에코백을 들고 온 내편

by Killara Oct 02. 2021

살짝 고리 할  고소한 굴비를 구우며 창틀 밖으로 넘어간 생선 냄새로 인해 노골적으로 비난을 받고 나서는 어린 두 딸의 엄마는 좀 위축되었다. 남의 집 셋방살이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30대 중반을 향한 나이였으니 세상과 부딪친 경험이 적은 탓이렸다. 무엇보다도 이쪽 상황을 영어로 예의 바르게 전달하여 단번에 양해를 구하며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낮은 일종의 문맹 상태이니 그로 인한 우울감도 적지 않았다.


"딩동~"

또 윗집인가?


아, 1층 정원을 낀 할머니네다. 70세가 훌쩍 넘은 키가 큰 Nancy 할머니는 날씬한 차림새에 고운 회색 모발의 멋쟁이이다.  단발머리에 4.5cm 굽의 까만 구두를 단정하게 신고 원피스를 즐겨 입는 할머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학교생활에 어려운 점은 없는지, 혹여 어려움이 있으면 참지 말고 꼭 말해달라고 얘기하곤 했다. 이방인을 도와주겠다는 할머니는 늘 상냥하게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서 두 아이가 이제 시작한 영어단어로 입을 뗄 기회를  만들곤 했다.


"학교 생활은 어때? 도서관은 자주 가고 있는 거지? 이 헝겊 가방은 내가 유럽 여행 다녀온 길에 비행기에서 선물로 받은 거야. 얘들아, 가방이 두 개이니 너희 둘이 도서관에서 책 빌릴 때 사용하면 어떨까?"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뒷뜰에서 처음 본 라임나무를 지켜만 보았던 시절...



도서관용  에코백이다. 가톨릭 초등학교는 금요일이면 교내 도서관 방문 수업이 있다. 보고 싶은 책을 빌려서 미리 준비한 보조가방에 책을 담아서 집으로 가져간다. 학교 도서관의 책을 빌릴 때는 1회 2권 이내로 제한된다. 대신 수요일에는 학교 바로 입구에 있는 건물의 구청 도서관에 가는 '독서수업'이 있다. 그곳에서 주 1회 3권까지 책을 빌릴 수 있다. 구청 도서관 역시 책을 담을 수 있는 보조가방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이들은 책을 빌릴 수 없다. 물론 급하면 백화점 쇼핑백도 책을 담는 보조가방으로 가능하다. 어려서부터 공공 도서관의  책을 소중하게 대접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좋은 규칙이다. 그래서 아이엄마는 부리나케 손 바느질로 만든 헝겊 백을 2개씩 아이들 가방에 접어서 넣어주었다. 그렇게 빌려온 책은 꼭 헝겊가방에 담아 보관하고 읽은 뒤에 다시 넣어두니 책 수명이 오래 유지된다. 낸시할머니가 선물한 보조가방은 손잡이가 튼튼한 에코백이니 구청 도서관에 가족이 함께 일요일에 들를 때 가져가면 에코백 하나당 커다란 그림 동화책 서너 권은 담아서 빌려올 수 있겠다.  


5살과 7살의 큰 서울이 와 작은 서울이... 이때의 아이들 독서방식은 '보고 또 보고'이다. TV 프로그램도 '보고 또 보고'여서 두 아이가 유아원과 학교에 있는 동안 엄마는 부지런히 만화영화를 녹화해 두고 다시 테이프에 옮겼다. 비디오는 집에서 보고 또 보고, 테이프는 수영장 가는 날이나 쇼핑가는 날 차에서 틀어주면 이미 TV에서 시청했던 장면을 되새기며 '듣고 또 듣고'이다.  45분짜리부터 120분짜리  까지 손바닥 크기의 다양한 녹음테이프는 오고 가는 동안 같은 내용을 최소한 두 번은  듣게  되는 거다. 스무 번을 돌려도 처음 보는 것처럼 진지하고 재미있게 듣고 보는  모습이 엄마에게는 신기하다.  시드니 한복판에 거주하지만 원어민과 대화할 일이 거의 없는  집순이인 엄마의 영어도 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해외 거주 시기에 아이엄마는 통번역 대학원에서 두 서울이가 보여준 '보고 또 보고' 방법이 아주 좋은 권장 학습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6학년, 중학교 2학년이 된 두 서울이 들은 악기 레슨을 위해 움직이는  차 속에서 30분짜리 CNN테이프를 반복으로 듣는 것은 지루해했다. 온통 뉴스였으므로... 그때는 세계적으로 아랍과 미 동맹국 사이에 전운이 돌고 북한의 크고 작은 도발로 한국이 자주 비상한 시국이 되어  관련뉴스들이 전 세계로 전해지곤 했다.  그때 엄마가 녹음한 CH 7 뉴스가 '9.11 테러' 뉴스와  '김정일~'로 시작하는 무거운 새용이었다.  만화영화가 아닌 데다가 잔뜩 긴장한 앵커들의 목청 높인 시사 뉴스들의 '듣고 또 듣고'는 시험을 코 앞에 두고, 두 서울이의 악기 레슨을 위해 왕복 2시간을 움직이는 엄마에게만 절박했으므로.


교육이나 학습에 직접 목적을 두고 시도한 건 아니지만, 당시 두 서울이의  언어 학습은 '보고 또 보고'와 '듣고 또 듣고'로 해결되었었나 보다. 늦게 시작한 영어도 한글도 두 서울이는 TV 만화와 도서관 동화책의 무한반복 사용 덕분에 익혔다.


손녀가 영국에 있어서 만나지 못하니 그립다는 단발머리의 그녀는 5살 7살 된 두 서율이에게 그날부터 '가방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엄마, 가방 할머니가 오늘~"로 시작하는 대화가 생겼다.


그곳에서는 한국과 달리 초등학교 저학년 아동의 경우에 어린아이들만 외출하는 일은 불가하고, 쇼핑센터에서 물건을 살 수도 없다.  당연히 초등학생만 집에 남겨두어도 안된다. 화재 등 긴급상황에 아이들의 대처가 어렵고 위험하므로... 인구밀도가 낮고 대부분이 드문드문 배치한 단독주택에 거주하며, 주거지와 상가가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는 그 도시에서는 물건을 구입하려면 걸어서 갈 수 있는 보다는 차로 움직여야 하는 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항상 부모와 동반하는 두 서울이가 가방 할머니를 만나는 시간은 등하교 때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에 마주치거나, 주차장 앞 뜰에서 엄마와 함께 줄넘기 놀이를 할 때 마주치는 정도이다.


그래도 두 서울이는  에코백 선물 이후 아래층 가방 할머니의 머리가 곱게 다듬어지거나, 염색 색상이 달라지는 것에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엄마, 할머니가 오늘도 우릴 보고 웃어줬어요. 할머니 원피스 참 예뻐요"처럼 큰 서울이 와 작은 서울이는 할머니의 온기에 대해 상호작용(interaction)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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