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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아픔'역에서 출발합니다.

by 이지희

길을 나서려 하니 발걸음이 가볍다가도 쓰디쓴 찬 바람에 이미 나선 발걸음이 멈춰 서길 그렇게 반복하였다.

어엿하게 준비되었다 생각했는데 작은 구멍하나에도 큰 구멍이 뚫린 듯 큰 몸짓으로 방어하다 불편한 느낌이 들어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을 찰나에 차라리 힘을 빼고 무릎 꿇어 기도를 한다.

어떤 나의 연약함이라든지, 내 눈에만 또렷하게 보이는 나의 부족함이라든지, 나를 약하게 하는 그러한 것들에 나의 발걸음은 무겁고 무겁고 또 무거워진다.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책임감과 가정에 대한 의무감과 혼돈 속 수많은 돌부리들이 나에게 크고 작은 짐들이 되지 않고 사랑으로 그저 사랑으로 내 하루를 뒤덮어 모든 존재들이 각자 가진 자신의 힘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감사함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나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작은 생각에 딱 한 발자국 내디딜 힘으로 문을 열고 나섰다.


4년 만이다.

유학의 길을 뒤로하고, 모교로 돌아왔다.

다시금 들리는 익숙한 강의 소리와 곳곳에 심어진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향내음이 고요한 나의 내면의 세계를 굵직굵직한 기차소리와 함께 모든 역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돌고 돌아 나는 잠시 '아픔' 역에 내렸다.

나는 학교를 떠난 후 지금껏 내가 탄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서 이렇게 늦게 데려다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차와 철로는 그대로였고 내 눈이 가려진 채 내가 내 발로 기차에서 내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딜 가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 역으로 향하려던 것이었을까?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나는 결국 돌고 돌아 눈물과 설렘을 마음속 고이 간직한 채 이렇게 '아픔' 역에 도착했다. 어쩌다 보니 내게로 왔던 많은 사건들 속에서 가까스로 눈을 들고 아픔을 견디다 모름에 감사하고 앎에 기뻐했던 것들이 다 섞여서 그저 말로 표현되지 못한 것들 속에서 나의 마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함을 느꼈을 뿐인 채로.

그렇게 고스란히 다가오는 감정을 다 받아들이고 나니 아픔이 지나갔다.

나는 다시 기차에 탔고 이제 기차는 '아픔' 역에서 출발한다.


결코 돌이킬 수 없던 시간들을 나는 묵직이 견디어 내보기로 했다.

지금의 내가 설 수 있는 곳에서 나는 발걸음을 지키고 온전히 걸어가기로 했다.

걱정스러운 말들과 염려들과 아픔들도 나를 빗대어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더욱 많기에 나는 들끓는 마음속에 어린 열정을 그저 품어내며 나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니 돌이키라고 내가 나에게 재촉하지 않아도 되니 그저 앞을 향해 전진할 때라고 묵묵히 말하며 나는 내 눈물을 닦아준 채 걸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할 때 나는 내 길이 환하게 빛처럼 열릴 것이라 믿는다.

그럴 때 나의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균형을 이루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 믿는다.


가방을 멘 어깨가 무거워진다.

더 무겁다 느껴지기 전에 멈추지만 말자고 되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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