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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희숙 Oct 18. 2024

바퀴벌레와 텐트

 18평 남짓한 빌라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 이사해 내가 호주로 워킹을 갈 때까지 살았다. 호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새벽 한국으로 로 귀국하자마자 나를 데리러 나온 남자 친구는 곧바로 경상남도 진해로 나를 데려왔다.


 그렇게 마주한 60평 남짓한 태권도장은 비교도 안 되게 컸지만, 비가 새고 냄새가 나고 바퀴벌레들이 득실거렸다.

귀국 후 한국에서의 첫날밤은 바퀴벌레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홀을 피해 사무실 한편 2인용 모기장 텐트 안이었다.

·

·

 호주에서 남자 친구와의 이별을 고민하고 있었다.

받은 것이 너무 많아 헤어지자는 몹쓸 말을 먼저 꺼내기는 어려웠고 자연스레 연락이 몇 개월 뜸하다 보면 헤어지지 않을까 하 는 생각에 스카이프를 켜지 않은 채 지냈다.

일하다 잃어버린 3번째 핸드폰 번호도 남겨주지 않았다.


 호주로 온 첫날 만든 페이스북으로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나와 연락이 안 된다는 이유로 남자 친구와 통화했다고. 그렇게 다시 모르는 척 연락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호주로 2개월 정도 여행 올 거라는 말을 남겼다.


 승무원 3번째 도전에 실패하고 관심은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수요가 없어 전망이 밝지 않았던 음악치료로 대학원을 진학하고 싶어 아이엘츠 평균 점수 8점을 위해 달에 4번의 과외비로 70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준비하고 있었던 때였다. 당연히 남자 친구와 엄마에게 호주에서 진학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뒤 이루어진 그의 호주 방문 통보는 어떻게 보면 청천벽력이었다.


 호주 환율이 1200원대였던 당시 한 달 수입이 선글라스를 잘 팔 아 30개 넘는 가게 중 1등에서 3등까지의 하루 수익을 높게 낸 사람에게 주는 인센티브까지 받은 날이면 하루에 40만 원도 넘게 벌 수 있는 구조였다.

 일주일 3번만 일하고도 월급이 300만 원이 넘어가기도 했던 나는 모든 생활비를 제외하고도 8개월 만에 한국 돈으로 천만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돈을 더 벌어 대학원 비로 충당할 거라고 모으고 있었던 때였는데 이럴 때 호주에 온다니.

가져올 수 있는 돈이 고작 비행기 삯 빼고 120만 원 정도라니..


 열심히 방도 알아보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태권도장을 알아봐도 경력과 나이가 많은 남자 친구에게 기본급 이상의 시급을 두 달의 조건으로 일을 주려는 도장은 없었고, 120만 원 안에 식료품, 기본 생활용품 가격을 제외하고 적당한 방을 찾으려 하니 내가 머물던 환경과는 너무 다른 환경이라 권할 수도 없었다.


 그는 호주 상하이에서 태권도장을 선배와 함께 운영하는 제안을 받아 취업비자와 날짜까지 받은 상태로 나를 설득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으니,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내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상하이도 나쁘지 않다는 말이었다. 한국으로는 죽어도 돌아가기 싫다는 내 의견이 반영된 혹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전제로 동거하게 되었다.

자리가 잡혀있는 남자 친구의 환경에 안도하여 호주를 떠나기 전 여행해야 한다며 브리즈번의 구석구석 멜버른, 시드니, 뉴질랜드 까지 열심히 여행 다니면서 내일이 없다는 듯 모은 돈을 탕진해 갔다. 그리고 뒷바라지하는 남자 친구의 자상한 모습에 같이 산다면 행복할 것 같은 단꿈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자 친구가 중국으로 입국을 위해 한국으로 귀국한 지 일주일 후 갑자기 같이 일하기로 한 선배가 갖가지 이유를 대며 큰 관장님에게 상하이에서 함께 일하는 것을 취소해 주십사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이 잘 풀리지 않게 되었고 부랴부랴 큰 관장님께서 알아봐 주신 도장이 진해에 있는 태권도장이었고 나는 호주에서 상하이가 아닌 경남 진해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도장에서 남편과 함께 사범님으로 일하게 되었다.


 태권도를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내가 도복을 입고 사범님으로 불릴 만큼 철면피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아이들과 함께 태권도를 배워 1단을 따고 난 후 도복을 입었고 그렇게도 싫어했던 시끄러운 기합 소리와 땀 냄새, 남편의 자상하기만 한 모습이 아닌 모습에 적응해 갔다.


 체육관에서 사범으로 지낸 7여 년간의 시간은 음악학원 원장으로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확고한 교육 가치관을 가지고 자리 잡게 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양한 성향의 아이들이 단체로 운동하는 태권도장에서 예상 밖의 여러 가지 상황들이 생길 때마다 부딪혀 가며 그 안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던 남편의 일 처리 방식을 통해 개인 수업만 하던 교육방식의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직, 간접적인 경험으로 단순 레스너가 아닌 교육 서비스 업에 종사하는 원장이자 선생으로서 나의 내면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던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여러 해가 지나고 깜깜한 밤을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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