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자꾸 전화가 온다. 그 어색하게 뚝뚝 끊기는 짧은 대화가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어제는 묘한 안도감을 준다.
어릴적 우리 4남매는 아빠가 없었다. 5살 무렵 사진 속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아빠의 무릎에 서서 어깨에 팔을 두르고 행복하게 웃던 모습의 기억이 가장 좋았던 아빠와의 추억이다. 아빠는 그 이후 집을 비우는 날이 점차 많아졌고 중학교 즈음에서는 집에서 아빠의 흔적을 볼 수 없었다. 가끔 밖으로 불러내어 비싼 음식과 옷을 사주었다. 음식에도 격이 있다는 걸 가끔 맛보는 소고기와 조명이 유난히 반짝이던 식당, 회전하는 중국식 요리집에서 알게 되었다. 밥을 먹는 내내 돈을 왜 벌어야 하는지 아빠가 돈을 어떻게 벌고 있는지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하는 지 듣고 또 들었다. 아빠는 그렇게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우리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생활비를 보냈고, 대학 학비를 대주셨다.
아빠가 밉지는 않았다. 아빠가 돈을 버는 이유는 가족을 위해서라 했다. 어려서 고생을 많이 해서 우리는 굶기고 싶지 않았단다. 돈을 많이 벌어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 물려주고 싶단다. 애틋함은 아니지만 아빠는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구나 했다. 집에 오지 않지만 자식들을 위해 돈을 버는 아빠. 매일 우리와 살지만 자신의 감정과 슬픔에만 충실한 엄마. 누가 더 자식을 위하는 일인 건가. 각자 부족한 인간인채로 자신을 지키며 자식을 지킨거라고 이제 겨우 알아갈 뿐이다.
우리 4남매는 그런 환경에서 각자도생을 배우며 부모의 울타리같은 건 애초에 없는 아이들 처럼 자랐다. 가정이 불행하면 형제간에 사이가 좋을거라 생각한다. 완전한 악역이 있다면 자식은 선으로 뭉칠 수도 있으려나. 그러나 우리집처럼 선인 듯 악인 듯 그 경계를 모르겠는 부모들에게서 자란 나는 나를 살아내기도 바빴다.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요구하면 된다는 걸 알지 못했다. 혼자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주로 밖에서 지냈다. 집은 그냥 잠을 자는 곳이었다. 더이상 아빠의 존재도 엄마의 보호도 바라지 않았다. 가끔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아빠, 사랑하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아빠와 싸운 이야기, 엄마에게 서운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엄마, 아빠가 있기는 하지' 했다. 무감각.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엄마가 사건을 일으키면 분노라는 아이가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르게 튀어나와 나를 넘어뜨리기는 했지만 그 외 시간들은 엄마와 아빠는 없는 존재였다.
4남매가 하나둘 결혼을 하기 시작했다. 결혼식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가족이라는 모습을 어설피 만들어내야 했다. 내가 시작이었다. 부모님 석에 누가 앉아야 하는지, 하객은 누구를 불러야 하는 건지 이 이상하게 흩어진 가족을 모으고 자리를 잡는 일이 어색했다. 굳어진 마음의 자리를 억지로 움직여 내 안에 자리를 만들고 위치를 바꾸는 일은 결혼 준비와는 상관없는 나만의 스트레스였다. 서로 앙숙인 이모와 아빠의 가족들. 그럼에도 이혼은 하지 않았기에 혼인관계는 유지하고 있는 이상한 가족이 앉아있는 결혼식장을 걸어 들어갔다.고된 시간을 살아온 자신을 측은히 여기는 엄마의 한숨 섞인 눈물과 경제적 책임을 진 가장으로서의 아빠의 당당함을 보면서 비로소 집에서 탈출한다는 해방감에 나는 결혼식 내내 웃었다. 유명 호텔에서 맞춘 고급스러운 남편의 양복이 이상한 결혼식의 상징물 처럼 아직도 옷장 한 칸을 채우고 있다.
아빠가 아프다. 혈액암. 정확히 말하면 형이상증후군. 이후 아빠는 변했다. 자꾸 전화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