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쉥이는 적당한 바위에 정착하고 나면 자신의 뇌를 소화시켜 버립니다. 뇌는 흔적만 남게 되지요. 뇌가 움직임을 위해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출근길 김주환 교수님의 유튜브 강의 중 우렁쉥이가 뇌를 소화시키고 살아간다는 내용이 귀에 꽂혔다. 뇌를 소화시킨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우렁쉥이란 명사 자체가 생소해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운전 중이라 소리만 연결해 둔 상황이라 영상을 볼 수도없는 상황. 쉥이였나. 생이였나. 검색을 하며 찾아보니 많이 보던 사진이 나온다. 시장통 구석 빨간다라이 가득 담겨있던 멍게. 약간 쌉싸름한 바닷물 맛이 나는 해물. 연관되어 검색되는 내용으로 표준어 논쟁이 뒤따라 나왔다. '우렁쉥이’가 현대 서울사람들이 쓰는 말이었지만 경상도의 ‘멍게’가 더 대중적으로 쓰이면서 표준어의 자리를 획득. 표준국어대사전엔 우렁쉥이가 멍게의 동의어로 표시된다는 스토리. 변방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신영복선생님의 이론이 현현하는 순간이 아닌가. 세상에는 멍게를 우렁쉥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다니. 지식이 한 치 만큼 늘어난 것인가. 생이가 아니고 쉥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일까.
멍게는 올챙이 시절을 거친다고 한다. 바닷속을 떠다니는 플랑크톤 같은 느낌의 작은 생명. 그때는 미약하나마 뇌와 신경계를 갖춘 동물에 해당하지만, 유속이 느린 바위를 찾아 정착하고 나면 본인의 뇌까지 소화시켜 버리고, 무뇌의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뇌가 없으니 생각도 못할 것. 무념무상의 경지. 그러한 현상을 통해서 우리의 뇌와 신경계는. 움직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추론이 완성된다. 곧이어 이어진 결론은 움직이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다는, 회복탄력성에 대해서 100번 설명 듣는 것보다 나가서 1시간 운동하라고 1시간 동안 세뇌하는 게 우울증에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라는 말.
['개구리 올챙이 시절'과 대비되는 '멍게도 올챙이 시절에는..]
그런 의미에서 점심은 회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멍게비빔밥을 먹으러 갔다. 멍게의 무심함이 만든 쌉싸름한 향과 제철 야채, 달콤한 초고추장이 어우러져 여름에 어울리는 맛이 나왔다. 같이 나온 매운탕도 MSG 가득한 감칠맛이 일품이었다. 역시 멍게는 여름이 제철이지. 멍게 같은 삶은 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을 해볼까 하다가. 생각 없이 흐르는 물속에서 주어지는 만큼 먹고 지내는 삶도 나쁠 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빨판 붙이고 살 자리라도 있고, 고만고만한 친구들도 옆에 오밀조밀. 그들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고고라는 이름의 멍게가 '오늘자 바닷물에 쓸려온 플랑크톤은 유난히 프레쉬한걸요'라고 말하면 디디라는 멍게가 '제가 플랑크톤 만한 시절에도 남들과는 달랐어요'라고 답하면서. 그런 실없는 말들을 나누며 멍게들만의 고도를 기다릴지도 모를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