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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창승 Feb 03. 2023

백설(白雪)

봄을 삼킨 듯 풍성해진 눈발이

영원한 마침표의 위세를 증언하려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내렸다     


무수한 웃음 노랗게 뛰놀던

그곳의 그 들판 위에는

수북이 쌓인 눈의 서늘함 반짝여

멀리서도 살갗을 아리게 하였다     


하루 전에도 존재하지 않던 백색이

백 년은 존재해 온 것처럼

천 년은 더 존재할 것처럼

고요한 폭정을 휘두르는 겨울     


하얗게 까마득한 풍광은

시간의 춤사위 보지 못하도록

어지러이 두 눈을 괴롭히니     


아 녹지 않는다 이 눈은, 하고

체념 어린 시선을 책장 위에 얹어

허무한 사상의 흔적을 매만진다     


그렇게 하루 또 하루 또 하루 또 하루

시든 세상의 한구석에

나의 자그마한 온기 하나 남았을까

쓸쓸해진 숨으로 굳은 목을 돌리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신비의 흙빛과

차디찬 순결을 더럽히는 얼룩과

스륵 죽어가는 죽음의 정령들과

그친 적 없는 시간의 젖은 몸짓     


어느새 녹고 있던 얼음 대지와

능선 위 흐릿한 봄의 조우(遭遇)가

내일의 형상을 조심스레 빚는다     


하나둘 사그라드는 순백의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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