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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Jun 05. 2024

남편의 “엄마한테 먼저 말씀드리고 예약하자”는 말

엄마 엄마 엄마아아아앜...!!!!!

하루에도 우리는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합니다. 몇 시에 일어날지,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아침은 뭐 먹고 점심은 뭐 먹고 저녁은 뭐 먹을지, 언제 잠자리에 들지, 내일은 뭐 할지, 주말에는 뭐 할지... 그리고 그 시간들을 내가 좋아하는 활동들로 채워가는 게 소소한 행복 아니겠습니까.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른이! 자기 결정권이 저에게는 정말 중요합니다. 결혼 초반,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라던 남편과 그의 여사친, 그리고 시어머니 덕분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강박적으로 고민하고 고민하게 됐어요. 그렇게 나를 알아가기 위해, 그리고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일기처럼 글을 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사로운 일상들이 이미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해져 있고, 거부할 수 조차 없는 상황이 바로 시집살이라는 걸 이번에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말 그대로 창살 없는 감옥. 그동안 시댁과 멀리 떨어져 살아서 + 코로나 팬데믹 덕분에 시댁 스트레스가 덜 했는데 가까이 오니... 이거 정말 신세계네요~~ ^^


남편의 입장에서는 본가에 방문한 것이니 기세등등합니다. 모두가 아는 사람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 다 자기 편인 사람들이니까요. ㅎㅎ 사람들과 오랜만에 만나고, 익숙한 거리를 걷고, 과거의 영광(?)을 회상하며, 이 순간을 즐기는 거죠. 아마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여기 있는 재밌게 편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고요.


처음에는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관심이 너무너무 부담이었어요. 2-3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편하게 있다 가라는 말씀에 저는 진짜로 편하게 있을 예정이었거든요. ㅎㅎ 그런데 여전히 눈치를 보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아직 그 관계가 저에게는 불편하다는 이야기겠죠. 원하지 않는 호의는 강제적 폭력이 될 수도 있잖아요. 물론 거절해도 된다고 항상 말해주긴 합니다만.




이런 배경에서 지난주, 남편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시어머님 친구 댁에서 하우스 시팅을 하고 있었고 다른 숙소로 옮기기 전 하루의 공백이 생겼어요. (원래는 시댁에서 머물렀겠지만 정말 다행히도^^ 리모델링 공사 중이라 숙소를 구해야 하는 상황) 저는 호텔에서 하루 머물자고 했는데 남편은 몇 번이고 이 집 별채에 하루 더 머물자고 또 얘기하더라고요.


별채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한 밤 중에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밖으로 나와서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안방과 거실을 지나가야지만 화장실이 있거든요. 저는 하룻밤이지만 굳이 그렇게 눈치 보이게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고, 남편은 가족끼리 친한 사람 집이니 괜찮다며 굳이 호텔비를 지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었죠.


그렇게 싫다는 데 왜 억지로 불편한 곳에서 지내야 하냐며! 지금 시댁 근처에 온 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많이 양보한 것인 줄 아냐고!! 부글부글 끓었지만 일단 참고 잘~~ 대화로~~ 호텔에 가기로 결정했는데요. 제가 호텔을 예약하려고 하니, 남편 왈.




엄마한테 먼저 말씀드리고 예약하자




엄마 엄마 엄마아아아앜...!!!!! 시댁 근처에 온 뒤로 그 엄마 소리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하나? 하는 두려움이 확 몰려든 거 있죠. 내 돈으로 내가 호텔 예약하는데 시어머니 허락까지 맡아야 하다니...


나중에 보니 당사자인 저를 제외한 채, 시댁에서 이미 그렇게 하면 되겠다 정해놓고 저에게 물어본 것이었어요. 게다가 작은 마을이니 저만 모르고 동네 사람들까지도 다 아는 그런 상황. 여기서 저 혼자 그 아름다운 호의를 거절하는 악인이 되어야만 하는 상황인 거죠 ㅋㅋㅋ 


사실 문제는 호텔이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이런 사소한 일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결정을 할 텐데 그때마다 시어머니에게 휘둘리거나 영향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궁지에 몰린 기분이 들었어요. 거절해도 된다고 말만 해놓고 실제로 거절하면 이렇게 설득을 시키는 게, 사람 기만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제가 죽어도 안 간다 하면 안 가는 거지만, 다들 괜찮다는데 저만 반대하자니 이상한 사람 되는 꼴이잖아요.


남편은 우리가 시어머니 손님으로 타운에 방문한 것이고, 시어머니 덕분에 친구분 댁에 머물 수 있었으니까, 이런 결정을 하기 전에 알리는 게 예의가 아니겠냐고 설명했어요. 맞는 말 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시어머니게서 반대하실 분은 아니실 테니, 어차피 호텔을 가게 될 거라면 왜 예약 먼저 하고 말씀드릴 수는 없는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왜 제가 예약을 못하게 하면서까지 엄마에게 먼저 허락(?) 양해(?)를 구해야 했는지...?




silver lining




그렇게 눈물 바람으로 하루 종일 싸웠는데 사건은 아주 우연하게도 해결이 됐어요. 첫 번째로는 바로 남편이 파트타임으로 지원한 회사에서 먼저 연락이 와서 예상했던 날짜보다 빨리 일을 시작하게 됐지 뭐예요. 그래서 회사가 있는 도시로 이사가게 됐어요. 두 번째로는 시어머니 친구분께서 여행을 하루 더 연장하셔서 호텔을 예약하니 마니 할 필요 자체가 없어졌어요.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굳이 하나하나 다툴 필요 없이 그냥 넘어갈 걸 그랬어요. 시어머니께 언제 말씀드리던 어차피 호텔 예약 했었을 것이고, 시어머니께서 반대하시든 말든 저는 호텔을 갈 것이었는데. 앞으로 평생 이렇게 살까 봐 두려운 마음 역시 지금도 생생하지만, 그때마다 행동으로 보여주면 됐을 텐데 말이에요.


그동안 아홉 번을 참고 딱 한 번 터졌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해결이 되다니. 그냥 시간을 좀 갖고 기다렸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인데... 지낼 곳도, 일할 곳도 정해진 게 없는 미래가 너무 불안해서, 뭐 하나라도 제 뜻대로 결정됐으면 좋겠다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었나 봐요.




창살 없는 감옥, 그 감옥을 제 발로 나가는 것부터가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른이의 자기 주도적 삶의 방식 아니겠습니까. 저의 일상을 지켜나가고, 바운더리를 존중하는 것조차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2주 반 시댁과 가까이 살면서 저는 최선을 다했고, 대부분의 기간 동안 조화롭게 잘 지내왔다고 생각해요.


이 일화는, 남편이 저에게 시댁과 잘 지내는 유연한 자세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저도 남편에게 거절해도 괜찮다고 본인이 한 말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시어머니께서 제게 주시는 사랑과 관심을 감사히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저를 존중해 주실 수 있는 기회를 제가 시어머니께 드린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시어머니도 제가 불편하거나 불행하길 바라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 제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 남편과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제가 시어머니께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라고 믿습니다^^;; 저를 나쁜 며느리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 또한 그렇게 믿는 시어머니의 선택이니 존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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