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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모 May 22. 2024

태극기 다는 날

8살 나의 일기

1997년 8월 15일 금요일

날씨: 해 쨍쨍

일어난 시각: 7시

잠자는 시각: 9시


오늘은 광복절 이다. 광복절은 우리 나라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날 이다.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던졌다. 그래서 일본이 항복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태극기가 없어서 태극기 파는 아줌마 한테서 태극기를 사서 엄마랑 아빠랑 같이 태극기를 달았다.


어른이 된 나의 소회

나 어렸을 때만 해도 광복절, 삼일절, 개천절 등 국가적 기념 공휴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다는 것이 관례였다.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는 태극기 게양대가 있었고 봉달린 태극기를 사서 꽂아둠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었다.


나는 특히나 광복절이나 삼일절에 태극기를 꽂는 일을 꽤나 좋아했다. 공휴일이라 마냥 늘어져 쉬다가도 '아, 오늘이 광복절이지!'라는 생각이 들면 "엄마~ 태극기 어딨어?"하며 봉 태극기를 찾았고 엄마는 창고 어딘가에 보관해둔 태극기를 들고와 함께 베란다 난간 게양대에 꽂곤 했었다. 그렇게 하면 역사적 맥락에서 쌓여온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 같은 긴장감에 나도 함께 동참하여 힘을 보태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휴일이라 가끔 나들이를 갈 때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풍경 속에서 태극기를 안 단 집이 몇이나 있나 세어보고 그 수가 많을 때면 언짢아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애국심(?)의 시작이 이날이지 않았을까 싶다. 공휴일에 달아놓을 태극기를 함께 사고 달면서 엄마와 아빠는 광복절의 의미도 같이 알려주셨던 것 같다. 그 의미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분노와 치욕스러운 감정도 함께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엄마 아빠에게 전해 들었고 엄마 아빠는 그 시대를 사셨던 할머니 할아버지께 들었겠지. 할아버지는 언젠가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다는 나의 말에 평소 허허 웃으시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뭐하러 일본어를 배워?"라고 하셨었다. 이러한 역사의식과 반일감정은 세대를 거쳐 모두가 공감하는 어떠한 정신이었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행위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이 일기를 보자마자 지금 살고 있는 우리집 베란다 난간을 보러 나가 보았다. 태극기 게양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찾아보니 2010년대 이후에 지어진 아파트들에는 태극기 게양대를 거의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설계부터 다들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도 언젠가부터는 태극기 게양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게양대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랐으니까. 훗날 나의 아이와는 엄마아빠와 함께 역사를 배우고 태극기를 다는 경험을 전수해주긴 어려울 수 있겠다. 또 하나의 문화가 추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는 게 조금은 아쉬워진다.


글모 선생님의 코멘트

광복절의 의미를 알고 태극기를 달다니 기특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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