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o Jul 10. 2024

가을은 : 동물원 3집, 1990

우리들의 음악감상실

1990년 발매된 동물원 3집의 수록곡 '가을은' 노래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연재 글을 쓰면서, 정말로 노래로 떠나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꼭 다녀오고 싶은 시간과 공간이 생겼다.

1991년 학교 앞. 선배의 자취방.

턴테이블에 한 곡 한 곡 얹어주던 선배의 디제잉.

모여 앉은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음악이 흐르던 우리만의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비록 좁고 어둑한 방구석이었지만 다정했던 그곳.


보통의 선곡은 방 주인인 선배의 의식에 따라 노래가 이어졌는데, 누군가의 신청곡이 있으 바로 반영되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하던 노래는 시인과 촌장, 이문세, 김민기, 동물원, 김광석 등의 노래들.

가끔은 로이 오비슨 등의 팝송도 함께 들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동물원의 대표적인 곡(예를 들어,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널 사랑하겠어, 혜화동과 같은)들은 꽤나 알려져 있었지만, 동물원의 모든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들만은 동물원의 모든 노래를 좋아했다.

요즘으로 치면 '검정치마'의 노래들로 비유되려나.

모두가 아는 노래는 아니어도 나는 매료된 노래.


아마도 가을이었겠지.

그날 들었던 이 노래만은 주술처럼 기억나는 걸 보면.


그날도 우리는 약속이 없었지만 삼삼오오 마주쳤고,

선배의 방으로 모여 앉아 우리만의 청음회를 가졌다.

동물원 3집에 수록된, 청년 김창기가 쓰고 노래한 가을은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감상하게 되는 노래들은 그것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다.

김창기의 담백한 창법 때문일 수도 있고, 쓸쓸한 이 노래의 정취 때문일 수도 있다.


조용한 가운데 노래가 흘렀고, 갑자기 언니가 훅!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1학년이었지만, 언니는 졸업을 앞둔 4학년.

5분여의 긴 노래 덕분이었을까, 언니는 긴 숨을 토하듯 한참을 울었다.

언니가 흐느껴 우는 동안, 우리는 침묵으로 언니의 울음을 감싸 안아 방해하지 않았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던 카리스마가 강인하게만 느껴지던 그녀를 훅 무너뜨린 건 어떤 감정이었을까...


" 내가 바쁜 걸음에 희망이란 이름으로

   가슴 가득한 절망 속에 살아갈 때

   화해하라고 나의 어리석음과, 화해하라고 말해주네 "


이 후로 나도 숱하게 울었다. 노래의 저 대목에서.

살아보니, 나의 어리석음과 화해하는 일은 참 쉽지 않더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겉을 강하게 무장한 사람의 여린 속은, 언제나 자신과의 연속된 투쟁이라는 걸...

나 또한 잘 알게 되었다.


1991년의 그 방으로 돌아가 볼 수 있다면,

기꺼이 청음회를 열어준 선배에게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공허했던 내 젊은 한때를 채워주어서 감사하다고.

이제야 누군가를 안아줄 줄도 알게 된 내가 언니를 안고 함께 울겠지.

그동안 나도 많이 울고 싶었다고, 나도 위로가 필요했다고 말하겠지.






동물원 - 가을은 (youtube.com)


가을은  5:01


가을은 노을빛에 물든 단풍으로 우울한 입맞춤같은 은행잎으로
가을은 손끝을 스쳐가는 바람 속에 허한 기다림의 꿈을 꾸는 이슬 속에
내가 거친 숨결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굳게 닫힌 분노 속에 살아갈 때
다가가라고 먼저 사랑하라고 다가가라고 말해주네
가을은 회색빛에 물든 거리 위로 무감히 옷깃을 세운 모습들 위로
가을은 낙엽을 쓸고 가는 바람 속에 텅빈 하루를 보낸 고개 숙인 마음 속에
내가 바쁜 걸음에 희망이란 이름으로 가슴 가득한 절망 속에 살아갈 때
화해하라고 나의 어리석음과 화해하라고 말해주네
화해하라고 말해주네










이전 15화 깊은 밤을 날아서 : 이문세 4, 1987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