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입힐 아이 옷을 챙기고
머리맡에 알람을 켜 두고
잠에 들었다가
새벽녘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고 출근하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진다.
'시체가 눈을 뜨는 꿈' 같은 건
이제 꾸지 않게 되었다.
서서히 자연히
삶 속에 그대는 없는 사람이 된다.
슬퍼할 시간 따윈 주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나란 사람
어디가 참 많이 이상한 사람이구나
싶다.
장례식에서도 웃었다.
정신없는 그 와중에도
아는 사람 얼굴 수를 세고
돌아가서는 답례할 물품을 골랐다.
내 감정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타인에게 해야 할 목록에 기대었다.
남편에게도 위로받기 싫어
독불장군으로 버텨냈다.
왜 감추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랑받지 않은 딸처럼 구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누군가는 울며 해소하고
누군가는 말로 해소한다.
나는 풀어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쓰기로 했다.
그렇게 매주 일요일 두 시간,
돌아가신 아빠와 마주한다.
아빠는 내게
울어도 되고 네 안에 사랑을 표현해도 된다고
가르쳐 준다.
너를 맘껏 표현해 보라고
말로 눈으로 못하거든
글로 손으로
그렇게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사람답게
아름답게
나는 결국 나를 위해 쓴다.
당신을 추모하는 척
나를 위해 쓴다.
내가 가장 위로받는 방식으로
당신을 이용한다.
내가 가장 위대해 보이는 방식으로
당신을 그린다.
매주 두 시간
나와 만나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