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입주해서 5년 차가 되어보니
어제 저녁 주방 아일랜드 수납장에 두루마리 휴지를 정리해 넣으려고 문을 여는 순간 뭔가 확 튀어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알고 보니 문을 닫는 용수철이 고장 나서 빠져버린 것이었다. 고장 나기 전 정상인 상태를 알 수가 없어서 다시 조립하지도 고치지도 못하고 일단 문만 살짝 닫아두었다.
'아 이제 하나둘씩 슬슬 고장 나는구나.'
얼마 전부터 도어락, 세면대 부품, 벽지 등등 조금씩 소소하게 손봐야 하는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타일이 쩍쩍 갈라지거나 보일러가 터지고 누수가 생기는 수준의 심각한 하자는 없지만 집도 어쨌든 소모품이기에 시간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었다. 아파트의 건물 외벽도 가까이서 보면 군데군데 보수가 필요해 보이는 곳도 있었다.
새삼스레 날짜를 세어보니 벌써 입주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사전점검을 하고 입주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서 키를 받아 처음 이사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긴 이사 와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들이 눈 깜짝할 새 졸업해 벌써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올해 결혼 10년 차. 그동안 우리 부부가 살아온 집은 이곳을 포함해 총 5곳이다. 5곳 중 3곳은 서울 빌라 전세, 2곳은 경기도 아파트 전세와 자가였다.
5개의 주거지 중에 첫 내 집마련을 해서 입주한 현재의 집에서 가장 오래 살고 있다. 그전에 살던 집들은 시트콤처럼 크고 작은 이슈들이 매번 발생해서 전세 계약 만기도 못 채운 적도 있어 각 집마다 대략 1~2년 정도씩 살았다. 그동안 지불한 이사 비용과 부동산 중개비, 에어컨 설치비만 포함해도 상당한 금액일 것이다.
그간 거쳐온 집을 모두 포함해 아무래도 지금 집에 가장 큰 애정이 담겨있다. 처음 내 집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안정감과 1 주택자가 되면서 부동산과 관련된 모든 것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는 점이 큰 변화다. 등기 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생긴 것이다.
1 주택자로 처음 경험한 이 신축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새롭고 신기하고 과분할 만큼 쾌적했다. 다들 이렇게 살았는데 나만 몰랐나 싶어 억울할 만큼 좋았다. 그렇게 만족스럽던 아파트지만 결국 이 신축도 언젠가는 구축이 된다는 불변의 진리를 피하진 못할 것이다.
사실 지난 몇 개월간 한참 현재 신축 아파트에서 누리는 삶의 질을 내려놓고 서울로 입성해 1~2단계 위의 상급지로 옮겨가는 것에 고민했다. 경기도가 아닌 서울 구축 아파트에서 살며 서울의 편리한 인프라와 직주 근접, 집값 상승효과를 기대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연식이 있는 구축 아파트 환경으로 다운 그레이드하는 불편함을 받아들여야 했다. 실제로 서울엔 최소 10년 차부터 20년, 30년을 바라보는 아파트들도 많다.
단지 내에 차가 다니고 지하주차장과 엘리베이터가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 집 앞 최신식 놀이터와는 다른 삭막하고 조금은 낡고 초라한 놀이터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이들은 전학을 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하고 그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는 점도 고민됐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단짝, 베프의 개념이 강해서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지인과 대화 중에 이런 나의 고민들을 말하자 그 친구는 바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했다.
"아니 다 떠나서. 집에서 엘베를 부르는 기적. 그거 다 포기 가능하십니까?"
그 친구의 질문에 다시금 내가 누리는 신축 라이프의 기적들을 상기시켜 봤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으며 엘베를 부르고, 외출했다 오기 전에 집에 보일러를 가동할 수 있고, 창문을 열지 않고 자동 환기 시스템을 돌리고, 앱으로 방문자 차량등록을 해서 주차장 출입을 할 수 있게 하고, 유도등이 달려있는 지하 주차장에 건식 세차장이 있고, 개별 지하창고가 딸려 있는 이런 나의 일상생활이 누군가에게는 일반적이지 않을 만큼 훌륭한 주거 서비스임을 곱씹어봤다. 그리곤 역시나 이걸 단번에 내려놓기란 정말 쉽지 않겠다 싶었다.
신랑과 나 단지 우리 둘이라면 교통 좋은 서울 한복판 원룸이라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하지만 학령기 아이 셋이 있는 5인 가정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고려할 부분의 가치와 조건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걸어서 5분 거리 아파트 정문 앞에 학교가 있고, 차 없는 단지 안에서 마음껏 자전거와 킥보드를 타고, 친구들과 커뮤니티 헬스장에서 발레를 배우는 지금의 생활에 아이들은 대만족 중이다. 아니 만족한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 일반적이고 당연하다 여길 수 있다.
아이들은 우리 가족이 아사가야 한다면 평수가 지금보다 더 넓어진다거나 그래서 자기 혼자만의 방을 갖게 된다거나 장난감을 더 많이 늘어놔도 좁아 보이지 않는 멋진 곳으로의 이사가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군가는 요즘 아이들이 너무 결핍 없이 자라서 감사할 줄을 모른다고 부정적으로 볼지도 모르겠지만 부모된 입장으로 자기 자식에게 굳이 곰팡이핀 집과 언덕 위 빌라 같이 불편한 환경을 경험하게 하고 싶진 않다.
인생을 살며 어려움도 겪을 줄 알고 불편한 것도 참고 견디는 연습을 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가족의 거주 환경이 더 발전적이고 나아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부모로서 가장으로서의 목표이고 바람이다. 우리 기준에서 분에 넘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최대한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노력한다.
그런 부모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현재 아이들은 감사하게도 우리 때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지금의 신축 아파트가 우리 아이들에겐 거주지의 미니멈이 됐을 것이다.
때문에 아이들을 생각하고 인생을 생각할수록 집을 단순히 상급지로 옮겨가 자산 증식의 목적만으로 삼기는 어렵다고 느낀다. 아이들과 단지 내 광장을 산책하며 배드민턴을 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그야말로 삶의 질을 포기하며 아득바득 몸테크를 하면서 버텨야 하는 집에서 과연 아이들과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실거주와 투자는 분리하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다고 느낀다.
우선은 아이들이 하교하기 전에 어서 빨래산이 잔뜩 쌓아져 있는 거실부터 치워야겠다. 상급지로 이동하든지 평수를 더 넓혀가든지 어디로 이사를 가든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미니멀하고 쾌적하게 관리하는 자세부터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이 마인드부터가 아이들이 집을 대하는 태도의 미니멈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