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숙 Nov 28. 2022

어느 일요일의 일박이일

"너가 있어서 덜 우울해!"

 어제 저녁 목이네로 향했다. 한심하게도 전날 과음으로 술병이 난 상태였다. 교회에 가야 하는 것보다도, 지난주 정신실 소장님께 질문한 답변을 들어야 하는 것보다도, 목이에게 가지 못할까봐 머리가 아픈 와중에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 오전 10시쯤 해장국을 먹으니 점점 괜찮아졌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게 깊은 잠에 빠져버렸고 눈을 뜨니 오후 두 시가 넘어있었다. 시간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메스꺼움도, 두통도 가라앉아 있었다.

 새벽 내내 메스껍고 토하고 기대어 앉고 다시 토하고 눕기를 반복하며 단순한 기도를 반복했다. ‘주님 살려주세요.’ ‘주님 제발 살려주세요.’ 그리고 두 시가 넘어 깨어난 후 내 기도는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목이에게 갈 수 있어서 아주 다행입니다. 술을 끊어야겠습니다.’


 목이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친 후 막 일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머리가 젖은 채 문을 열어 맞아주었는데 왠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중목욕탕 라운지에 온 것 같았다. 목이네로 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오늘은 저녁만 먹고 오는 거야.’ ‘내일 나도, 목이도 일하려면 오늘은 둘 다 정말 잘 자야 해.’라고 나름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어림없다. 아늑한 목이의 공간과 목이를 보니 다짐은 포로로- 염치없게도 순식간에 휘발되어 버렸다.

 목이는 방에서, 나는 거실 테이블에서 각자 할 일을 했다. 한 시간,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그날 분량의 일을 끝낸 목이는 “뭐 먹을까?”하며 배달 어플을 한참 뒤졌고 “너는 먹고 싶은 게 없어? 왜 너는 기호가 없어?”라고 반복해서 물었다. 대답할 수만 있다면 대답하고 싶었지만 먹고 싶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속이 진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걸.


 우리는 둘 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았고 배달 주문을 포기하고 집 앞 마트로 향했다. 김부각을 사기 위해서였다. 목이는 지난번에 사다 준 새우김부각이 맛있었다며 '집 앞 마트에 새우김부각은 없어도 그냥 김부각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란히 마트를 향했다. 

 김부각을 비롯해 과자를 왕창 샀다. 목이는 신이 난 것 같았다. 과자 기호가 뚜렷하고, 기호에 맞는 과자를 찾는 목이는 신나 보였고 귀여웠다. 매대를 스캔하는 눈빛은 꽤 진지하고 과자를 집는 손은 재빠르다. 한번 집은 것은 그대로 고. 망설임이란 없다. 그 모습을 옆에 서서 보고 있으니 흡사 우리가 자매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어린 시절 함께 과자를 고르는 언니와 동생처럼 말이다. 

 과자를 한 바구니 가득 골랐고 목이가 과자를 쐈다. “통장에 1,500만원 꽂힌 기분 알아?” 내채공이 들어와서 자기가 사는 거라고 했지만 사실 내채공은 그럴싸한 이유일 뿐 그게 아니었어도 목이가 샀을 것이다. 


 환승연애 마지막 회차를 보며 과자를 몽땅 먹었고, 빨래를 널었고, 내가 요가 하는 동안 목이는 잠들었다. 기분 좋아지는 소리, 나를 안심하게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르렁 그르렁 목이가 잠에 빠져드는 소리. 숨소리는 살짝 거칠어지다가 얕게 코를 골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 진짜 잠들었어.” 라든지 “나 깜빡 잠들었었어.”하고는 “나 쪼금만 잘게. 미안.”하고 다시 잠이 든다.

 예전에는 먼저 잠드는 목이를 괴롭히고 싶었다. 장난을 걸고 싶고, 못 자게 하고 싶었다. 수평의 자세로 늦게까지 이야기하며 놀고 싶었다. 자는 시간이 아까웠다. 오래오래 같이 깨어 있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목이에게 단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늦게서야 깨달은 순간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잘 자고 개운하게 일어난 목이를 본 순간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목이의 단잠이 최우선순위가 되어버렸다. 아주 잘 자고 있는 목이, 잘 잔 얼굴로 개운하게 일어나는 시은이를 보는 것은 전에는 알지 못했던 기쁨이다. (잠들기 전, 먼저 잠이 든 목이를 보는 것뿐이다. 나는 한번 잠이 들면 목이가 사라져도 모를 정도로 자곤 해서 목이가 잘 자고 있는지 어쨌는지 모른다.) 목이는 자고 일어나는 것으로도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다.


 어젯밤은 (목이 옆이라면 언제나처럼) 나도 아주 잘 잤다. 처음 누워보는 목이의 침대, 포근하다 못해 열이 나는 목이의 겨울 이불 덕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것보다는 인간 난로처럼 이불 속을 먼저 데워 놓고 손을 잡아 준 목이의 지분이 더 클 것이다. 과음 여독인지 아니면 생리 때문인지 모를 원인 불분명한 두통이 살짝 남아 있었는데 말끔히 사라졌다. 정말 잘 잤다. 

 “너가 있어서 덜 우울해!”

 출근 준비를 하는 중에 목이가 말했다. 종종 목이는 툭 말을 내뱉는데 그 말들은 나를 감개무량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수줍게도 하고, 아주 많이 뿌듯하게 만들기도 하고, 뭐랄까? 며칠이고 그 말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게 만든달까? 내가 목이에게 필요한 도움이 되었다니! “그럼 또 오든가!” 장난스런 한마디가 이렇게도 싱글벙글할 일인가.


 나란히 걷는 월요일 출근길, 공기는 오토바이 매연과 담배 냄새 때문에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둘 다 암울하다거나 우울하다거나 죽상이지는 않은 출근길이었다. 

 “내가 너 대신 네 회사 저주를 실컷하고 있을 테니까 넌 잘 다녀와!”하고 목이 어깨를 한 번 힘껏 부여잡고는 목이를 보냈다. “갈게.” 하고 돌아서는 목이 얼굴이 지난주 토요일 세시 경 출근하던 얼굴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보다 가벼운 얼굴, 마음이 놓였다.

 목이와 같이 출근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지난주도 보고 이번 주도 보고 이렇게 보고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목이를 보게 될 줄이야! 7년 전 목이를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언제나 열렬한 목의 편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목이와 한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순간은 한순간 한순간이 무척이나 소중하다. 앞으로 우리가 더 가까워질지 아니면 멀어질지를 생각하면 겁이 나지만 그럴수록 지금 허락된 순간을 감사히 새겨야겠지.

 오늘, 이번주 목이의 시간이 무탈하고 빠르게 흘러가면 좋겠다. 그 끝에서 우리가 같이 과자를 먹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