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생을 하다 보면 연필이 정말 빠르게 짧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냉큼 내다 버리지는 않고, 짧아지면 짧아진 대로 고쳐 잡고 쓰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깍지를 꽂아 쓰고, 그마저도 안 되겠으면 아쉬운 대로 이젤 위에 가지런히 모셔놓는다- 마치 내내 힘내 준 연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아무리 물건이라 해도 정든 것에는 예우를 해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닐까 싶은데(어쩌면 나만 그럴지도 모를 일이지만) 유독 가전제품에게만큼은 그게 잘 안된다.
이사를 계획하며 돌아보니 집 안에 죄다 바꾸고 싶은 물건뿐이다. 가장 싼 걸로 구했던 전자레인지 겸 오븐도, 갑자기 투룸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급히 장만했던 큼지막한 냉장고와 세탁기도(투룸에는 이런 물품이 구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모두 멀쩡히 잘 쓰고 있는 물건들인데도 그렇다. 그때그때 형편에 맞는 대로, 필요에 따라 적당히 장만한 것들이기는 해도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온 이들에게 이토록 매정하다니.
오래가는 물건이 드문, 또는 그런 걸 원하는 사람들이 없는, 손때 묻은 물건 대신 헌것만이 존재하는, 뭐든 고쳐 쓰거나 아껴 쓸 필요가 없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 아닐까. 평생토록 겪어보지 못한 수준의 욕심이 생겨나고 있는 요즘, 이런 마음이 어색하고 영 마뜩잖아 괜스레 시대 탓을 해본다.
가전제품을 천년만년 쓸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번에는 부디 오래도록 '정을 붙이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집을 채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