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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미 May 20. 2023

내 이름은 조서희

9. 한글은 어려워요.

엄마가 네모가 가득한 종이를 내밀었어요. 네모칸을 다 채우면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맛 마이쮸를 5개 주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네모칸을 채우려면 규칙이 있대요.

규칙은 두 개의 글자가 만나 하나의 소리가 되는 거래요. 도움반 교실에서는 그림이 있는 카드를 보고 한 글자나 두 글자씩 읽었지만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글씨를 쓰면서 따라 읽으라고 했어요.


"기역!"

"기역!"

"니은!"

"니은"


기역부터 히읗까지 쓴 후 'ㅏ'를 붙여 썼어요. 그다음엔 'ㅑ'도 붙이고, 마지막 'ㅣ'까지 붙여 쓰면 네모칸은 다 채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칸이 너무 작아서 내가 글씨를 쓸 때마다 선 밖으로 연필이 튕겨나갔어요. 엄마는 지우개로 다시 지우고 쓰자고 했지요.

절반쯤 채우자 너무 힘이 들었어요. 엄마가 내 눈치를 보고 마이쮸를 한 개 주었지요. 달콤한 복숭아 향이 입안을 돌아다니며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어요. 나는 다시 연필을 잡고 엄마를 따라 했지요.


"피읖!"

"피읖!"


엄마가 주는 마이쮸가 2개만 남았을 때 네모가 가득했던 종이는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쓴 글자들로 채워졌어요. 이젠 남은 마이쮸를 먹으며 편히 쉬면 되겠다 싶었는데, 엄마의 속셈은 따로 있었나 봐요.


"서희야, 우리는 이번 주에 '나비'라는 글자를 외워서 치료실에 가야 해. 지금부터는 나비를 써 보는 거야. '니은'하고 '비읍' 기억나?"

"아니!"


나는 마이쮸를 우물거리며 대답했어요.


"자, 니은은 여기 이렇게 쓴 게 니은이고, 비읍은 이렇게 쓴 게 비읍이잖아."

"몰라."


나는 정말 뭐가 뭔지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내 이름을 혼자서 쓰는데도 1년이 넘게 걸렸는데 네모칸을 한 장만 채웠을 뿐인 나에게"나비"를 써 보라니요.

엄마는 다시 네모가 가득한 공책을 가져와서 내 손을 잡고 "니은"을 따라 하라며 글자를 채우기 시작했어요. 공책 한 바닥에 니은을 썼는데 엄마가 나한테 혼자서 써 보라고 했어요.

나는 "니은"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몰랐어요.


"서희야, 여기 니은을 한 바닥이나 썼잖아. 이렇게 그냥 '아래로 옆으로' 연필을 돌리면 돼."


나는 연필을 쥐고 공책 위에 올려놓고 엄마 눈을 바라봤어요. 내 입은 피노키오 코처럼 자꾸만 앞으로 나왔어요. 엄마의 얼굴을 보자 뭔가 마이쮸고 뭐고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어 졌어요.


"서희야, 우리가 지금까지 니은을 이렇게나 많이 썼는데, 니은을 못 쓰겠어? 기억 안 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자 눈물이 또르르 흐르며 얼굴에서 미끄럼을 탔어요.

엄마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더 엄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조서희! 선생님이 '나비'를 쓸 수 있게 연습해 오라고 하셨다고! 나비만 쓰며 돼. 나비만!"


따뜻한 봄날에 민들레 꽃 위에 앉아 쉬던 예쁜 나비가 이렇게 무서울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나비도 내 이름을 모를 텐데, 나는 왜 그렇게 나비 이름을 쓸 줄 알아야 하는 걸까요?

나는 네모가 가득한 공책을 3장이나 연습한 후에야 남은 마이쮸 2개를 받고, 엄마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어요.


"서희, 힘들었지? 잘했어. 힘들고 하기 싫어도 연습은 해야지. 이제 곧 2학년인데 친구들한테 놀림받으면 어쩌려고 그래. 네가 더 속상할 거잖아."


엄마는 내가 우리 반 인기스타라는 걸 아직도 모르나 봐요. 내가 한글을 몰라도 나는 괜찮았는데. 나는 친구들이 "서희는 엑스(X)래요." 하고 놀려도 그 말에 상처받지 않아요. 내 말에 반응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요.


다음날 치료실에 갔는데 수업이 끝날 때쯤 인지 선생님이 하얀 종이를 내밀었어요. 선생님은 정말로 "나비"라는 글자를 써 보라고 했어요. 

나는 갑자기 가슴이 콱 막혔어요. '또 시작이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선생님 책상 옆에 놓인 복숭아 마이쮸를 보는 순간 얼른 "나비"를 쓰고 저 마이쮸를 받아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ㅂ"


나는 엄마랑 열심히 연습한 "나비"를 당당하게 썼어요. 어제는 "니은"이 그렇게 생각이 안 나더니 오늘은 저절로 생각이 났지요. 나는 선생님 책상 위에 있는 마이쮸를 들고 문을 열고 나갔어요.


"엄마! 끝났어! 어딨어요?"


내 목소리에 엄마가 치료실로 들어왔어요. 엄마가 들어가자 나는 얼른 문을 닫고 마이쮸를 입에 넣었어요. 치료실 대기실로 가려는데 선생님 목소리가 들렸어요.


"어머님, 서희가 '나비'를 여전히 잘 못 쓰네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선생님은 잘 모르나 봐요. 

'니은도 쓰고 비읍도 썼는데.'

이렇게 쓰려면 네모칸을 수십 번 넘게 채워야 하는데 선생님은 그것도 모르면서 내가 잘 못 쓴다니요.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도 연습하고, 치료실에서도 연습하고, 학교에서도 연습하고, 엄마랑도 연습하는데 나는 한글이 너무 어려워요.

나도 잘하고 싶은데, 내 손은 한글을 쓰는 일이 싫은가 봐요. 

내 손에 복숭아 마이쮸를 10개 주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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