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린왕자 Sep 25. 2024

나는 차마 눈물 흘리고 말았다

말했잖아, 너도 꽃이라고


엊그제 심어 놓은 배추 모종이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

 목이 말랐을까 봐

 어쩌나 어쩌나 걱정만 하다

 이틀이 지난 오늘에서야 마주한다

 목마름에 지쳐가고 있는 가지는

 에워싼 그물망 아래로 익어가는데

 엉겨 붙은 마 잎은 아직 푸르다


 겹겹이 포개진 흙더미를 헤집고

 여린 배추 모종은 힘겹게 서 있다

 호미로 간신히 제 갈길 찾아

 두터운 골을 이고 선

 허리 구부려 파낸 세월이

 가녀린 잎사귀 위로 후드득 던져지는데

 나는 차마 거기서 눈물 흘리고 말았다


 그 많은 골을 파내느라

 힘겹도록 붉은 노을을 맞았을 텐데

 여명빛에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몇십 년을 엄마는 모진 저 골을

 가슴골에 파묻었을 텐데

 하루 이틀 지났다고 대수더냐

 쉽사리 쓰러져갈 인생이 아니다

 배추 모종이

 가지대가

 마 잎이

 어떤 때는

 꽃보다 더 예쁘다


 새벽을 거슬러 달아나는 내게

 시간은 머물러 있고

 꽃잎에 필요한 건 단 하나의 사랑

 초록 생명들이 나를 버티게 해주는

 그런 거라면

 시원하게 뿜어주는 가을바람소리도

 나는 꽃으로 여기겠다

 말했잖아

 너도 꽃이라고

이전 05화 우리는 함께 걷는 인연인지도 모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