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내가 지금 잃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것. 결핍이나 불안과 불확실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같은 걸 보면서도 불행하고 괴로워지기 시작한다. 회피하고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말하기 전에 사실을 직시한 채로 정확하게 앞을 보면서 불행할 수가 있고 행복할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한쪽으로 너무 과잉이 될 때는 시선을 살짝 돌려서 다른 방향을 잠시 봤다가 숨을 들이쉬고 다시 쳐다보자. 그걸로도 조금 시야가 트인다. 숨을 불어옇자. 힘이 바짝 들어갔을 때는 오히려 눈치채지 못한 걸 조금쯤은 보게 된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새가 없이 꽉 잡고 있다면 조금 느슨하게 힘을 빼는 작업도 필요한 것이다. 의외로 같은 문제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 있는 건 내가 가진 것과 내가 부족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같은 걸 바라봐서일 수 있다. 극단적인 예로 부모님이 있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부모님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정도 글 밖에 쓸 수 없어서 불행할 수 있고 이 정도 글이라도 쓸 수 있어서 행복할 수도 있다. 행복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는 방법을 안다. 앞서 말한 불확실하고 부족하고 결핍과 불안이 나를 안 놔줘도 말이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걸 언젠가는 아니 어쩌면 곧 잃을 거라는 사실을 직시하면 된다. 거짓말이 아니다. 반드시 이 모든 걸 놓게 되는 순간이 온다. 내가 원치 않아도 모든 걸 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시기조차 언제 닥칠지 알 수 없고 곧장 준비도 없이 다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럼 지금 가지고 있는 게 아직 내 곁에 있다는 게 지금 아직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몹시도 감사하게 여겨진다. 숨이 붙어있는 것도 아직 타자를 칠 수 있고 펜을 들 힘이 있고 눈이 좋지 않지만 내가 사랑하는 모든 광경을 이 눈으로 볼 수 있고 좋아하는 노래들을 들을 수 있고 보이니까 그림에 색을 칠할 수 있으며 내가 목소리가 있어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것까지 마치 기적처럼 감사하고 반짝거리는 빛무리처럼 느끼게 된다. 사람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바라볼지 그의 손에 달렸어. 여기 내가 들었던 아름다운 예시가 있다. 기억을 살살 긁어오다 보니 정확하지는 않다. 살아있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전부 없애버려야겠다고 생각할 수가 있고 살아있는 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볼 가치가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었다. 이 삶에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우리는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우리를 억압하는 처음부터 정해져있던 어떤 의미의 노예로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주인이 돼서 앞으로 내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굳이 내가 없애지 않아도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모두 다 없어질 예정이다. 그러니까 연습처럼 가볍게, 즐겁게 살아도 되는 것이지. 행복해도 된다는 말이다. 아주 쉽게 많이 행복해져도 된다. 아무 문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