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나 승주 오빠랑 사귀는 사람인 대요, 오빠가 언니랑 아직 정리를 못했대서요. 만나죠 우리.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승주가 누구랑 사귄다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대학 졸업 이후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우연히 만나 우리는 지금까지 연인이었다. 짧지도 않은 시간.. 7년을 연인이라 생각하고 지내 왔는데.. 이 전화 한 통에 승주에 대한 내 믿음이 산산이 부서졌다.
-유라: 누구라고요?
-민주: 언니, 못 들었어요? 뭐야 안 들리는 거야? 승주 오빠 애인이라고요. 언니가 계속 들러붙으니까 맘 약한 우리 오빠가 힘들어하잖아요..
이런 식빵에 쨈 바를 아이가 다 있나.. 김승주... 요단강 건너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유라: 아.. 그래요? 그래요 만나죠. 어디서 볼까요? 지금 일 때문에 오래 있지는 못하고 수원역 옆 우리은행 2층에 커피숍이 있어요. 그리로 와요
-민주: 지금 출발하면 20분 안에 도착하니까 있다 봐요 언니.
언니? 언제 봤다고 언니란 말인지... 그나저나 김승주.. 이 놈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이게 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이 필요했다. 전화기의 1번 버튼을 꾹 누르다가.. 아니야.. 일단 만나보고 통화하자 싶어서 바로 끊었다. 하... 깊이 심호흡을 하고...
우리은행 앞에 멈춰 섰다.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린다.
커피숍엔 아까 그 전화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창쪽에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숍 직원이 물을 가져다준다.
-커피숍 직원: 주문하시겠어요?
-유라: 아뇨 일행이 오면 주문할게요
긴장감 100%. 왜 안 오는 거야?? 입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벌써 물 한잔을 다 비웠다.
직원을 불러 물 한잔을 더 받고 한 모금 들이키는데 입구에서 한 여자가 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키는 175가 넘어 보인다.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몸매가 좋아 보이고 옷도 스타일 있게 입었다. 딱 봐도 20대 초반이다. 서른 하나인 나보다 훨씬 풋풋하고 예뻐 보였다.
민주는 선글라스를 벗고 내 앞에 앉았다.
-민주: 나왔네요 언니,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유라: 뭐 마실래요?
나는 커피숍 직원을 향해 손을 들었다.
-민주: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언니는요?
-유라: 같은 걸로 주세요..
직원이 가자 민주는 서슴없이 말을 꺼낸다.
-민주: 언니, 승주 오빠랑 7년 사귀었다면서요? 권태기 올 때 안됐어요? 오빠랑 나는 사귄 지 3개월 정도 됐어요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민주: 3개월 정도 만났는데 오빠가 아직 언니랑 정리를 못하고 힘들어해서 내가 나서는 거예요.. 울 오빠 힘든 거 옆에서 보고 있자니 자꾸 신경이 쓰여서요.
울 오빠?? 나는 점점 더 어이가 없었다. 침착해야 한다. 나는 나에게 주문을 걸었다.
-유라: 그랬어요? 어제 봤을 때도 아무 말이 없던데.. 승주가 많이 곤란했겠네요. 정확히 언제부터 사귄 거예요?
-민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죠? 언니도 오빠 별로 안 좋아했나 봐요.. 난 여기서 머리끄덩이 잡히나 싶어 준비하고 왔는데..
언니도 라는 말은... 승주도 나를 좋아하지 않다는 뜻이다. 정말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 놓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새파란 그녀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30대의 자존심 일수도 있고 버림받은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유라: 그랬구나. 섭섭해서 어떡하죠? 나 이제 회사 들어가 봐야 하는데.. 승주랑은 이야기해볼게요.. 승주 입장 알았으니까. 그쪽도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숍 직원이 아메리카노를 가지고 왔다. 나는 빨리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너무 서둘렀던 탓에 직원과 부딪쳤고 커피가 바닥에 쏟아져 컵이 깨지고 말았다.
젠장 오늘 일진이 왜 이런 거야?
-유라: 안 다쳤어요? 미안해요.. 어떡하죠?
나는 바닥에 떨어진 컵 조각을 주어 들었다.
-민주: 저 먼저 갈게요.. 커피값은 제가 계산할게요.. 나중에라도 보지 마요 언니.
분하고 또 분했다. 손에 힘을 너무 준 탓에 깨진 컵에 손을 베고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왠지 진 거 같은 기분이다.
-직원: 손님 괜찮으세요? 피가 나는데..
괜찮냐고? 니 눈엔 내가 괜찮아 보이니? 원망스러운 눈으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책상에 앉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후 5시 50분.. 조금 있으면 퇴근시간이다.
6시가 되기 무섭게 휴대폰은 또 진동으로 몸서리치고 있다.
김승주... 이 놈을 어떻게 하지? 분노에 찬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유라: 여보세요?
-승주: 유라야.. 난데..
-유라: 넌 줄 알아.. 왜??
-승주: 오늘 민주 만났다면서? 미안해. 말하려고 했는데..
-유라: 아냐 됐어. 나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전화 같은 거 안 해도 돼. 왜 이런 일을 만드니.. 빨리 얘기를 해주던가. 왜 사람을 바보로 만드냐고?
-승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유라: 그런 게 아니라니.. 뭐가 아닌 거야? 난 됐어.. 뭐, 잘됐지 머. 우리 너무 오래 만난 건 사실이니까. 너 뭐 권태기 그런 거 같은데.. 이해해. 어리고 예쁜 여자애한테 끌릴 수 있어.. 하~~ 아니 이해가 안 돼.. 넌 내가 그렇게 우스웠니? 말해봤자 뭐하겠어. 이미 맘 돌아섰는데.. 됐다. 너라도 행복하면 된 거지 뭐.
-승주: 그런 게 아니라니까!!
되려 화를 내고 전화를 끊어 버린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건지.. 최대한 침착하게 한다고 했는데.. 아.. 결국 나는 차인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결국 나는 새파란 어린애한테 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