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 항우울제 후기
매일 시끄러운 망아지 소리를 내며 히히힝- 웃어제끼던 내가 왜 갑자기 우울해졌을까. 왜 무기력해졌을까. 왜 패배감을 느낄까.
난 내가 무언가가 될 줄만 알았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서른에는 이미 기깔나는 커리어 우먼이 되어있을 줄 알았고, 서른다섯에는 이미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개뿔. 서른에 내 직업의 의미를 잃었고 서른다섯에 대차게 이별당하고 몸져누웠다.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룰루 랄라~ 오늘도 회사에서 시간만 때웠지롱, 나는야 신나는 월급 루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나의 쓸모와 존재의 의미로 직결되었다. 의미 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되자 곧바로 나는 쓸모없는 사람, 존재의 의미가 희미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약 10년의 세월을 투자해서 공부해 낸 전공인데, 허탈했고 패배감이 들었다. 우물을 파려고 했는데 엉뚱한 곳에 10년 동안 삽질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5년을 일하고 나니 번아웃도 왔다. 그저 나 자신이 동태 눈깔로 영혼 없이 일하다가 따박따박 월급이나 받고, 그 돈으로 몸뚱이 하나 먹이고 입히고 살리려고 애쓰는 세상의 먼지 같았다. 나의 우울감은 그때부터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있었던 듯하다.
그 후 내 인생에 심폐 소생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입학했던 하버드 대학원도 나를 패배감에서 구해줄 수는 없었다. 몸뚱이는 하버드 강의실에 앉아 있지만, 내 인생이 정처 없이 떠도는 것 같은 불안감이 끊임없이 찔러댔다. 쏼라쏼라대는 강의를 열심히 듣는 와중에도, 머릿속 한 켠에서는 '졸업 후에는 뭐 하지, 직업을 또 잘 못 선택하면 어떡하지, 나는 직업도 제대로 선택 못하는 병신인가, 또 실패하면 어떡하지, 난 인생을 왜 이렇게 돌아서 가지, 애초에 20살 때 전공 선택을 잘할 걸' 하는 찌질한 생각들이 메뚜기처럼 껑충껑충 난잡하게 뛰어다녔다. 도대체 인생이 나를 어디로 휩쓸어 가고 있는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가장 모르겠는 시기였다. 나의 내면은 깜깜한 밤 폭풍우 치는 바다에 휩쓸려가는 돛단배 같았다. 알 수 없는 자괴감과 우울감이 나를 자꾸만 지하로 끌어당겼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것은 실체 없는 패배감이었다. 내가 가진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버드고 나발이고를 다 떠나서, 그 어떠한 화려한 왕관도 구제해 줄 수 없을 만큼 나는 실체 없는 패배감에 압도당했다. 나의 뇌가 그렇게 기능하기를 절대 바라지도 예상하지도 않았었다. 코로나로 몇 달 동안 취업이 되지 않았을 때는 '하버드 간판도 구제해 줄 수 없는 찐따라서 취직이 안 되는 건가'라는 자괴감에 더욱 퐁당퐁당 빠졌다. 겨우 취직한 회사는 굉장히 똥 같았다. 나에 대한 불만족이 극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재택근무는 코로나 난장 속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었지만 나의 멘탈은 지켜줄 수 없었다. 코딱지만 한 원룸에 갇혀서 아무와도 교류 없이 혼자서 일하고 밥 먹고 자는 일은 나의 무기력과 우울을 가속시켰다. 고립감과 외로움이 더해진 우울은 참 진하고 무거웠다.
그리고 서른다섯의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과 벼락 맞은 것 같은 이별을 했다. 꽃밭 같던 내 세상이 갑자기 벼락을 맞아 우르르 꽝꽝 흔들리고 뒤틀려 버렸다.
그리하여 이지경에 다다랐다. 나의 무기력함과 우울감은 에린이 내게 항우울제 복용을 권할 만큼이 되었다. 현재 내 모습을 그려보자면, 어깨에 우울을 덕지덕지 붙이고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꼬락서니이다. 절대 바라지 않았던 일이다. 무기력을 느끼는 것, 슬픔을 느끼는 것, 우울을 느끼는 것, 패배감을 느끼는 것. 이런 것들을 느끼는 것을 절대 바라지 않았다.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내 감정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추위를 느끼고 싶어서 느끼는 것이 아니고, 더위를 느끼고 싶어서 느끼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내 감정이 무언가를 느끼는 것이 내 컨트롤 밖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저 속절없이 감정에 당했다. 어떤 용을 쓰고 서커스를 하며 날아다녀도 그와 아무 상관없이, 내 감정은 무기력과 우울만 느끼고 있었다.
감정이 내 의지와 역행하여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 기분은 호르몬의 노예인가? 항우울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그것은 가능했고 항우울제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매 달 그날이 오면 내 감정은 전쟁을 치른다. 미친 듯이 분노하고 슬프고 짜증 나고 무기력해지고 울음이 배꼽에서부터 올라온다. 호르몬의 사악한 장난에 속절없이 놀아나는 내 생각과 감정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낄 정도이다. 그래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과 기분이 호르몬에 따라 변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항우울제가 호르몬의 균형을 잡아준다면 나의 거지 같은 무력감, 우울감, 패배감과도 제발 굿바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처방받아야 하는 항우울제는 부작용, 의존성, 내성 등의 문제로 꺼려졌다. 그래서 천연 항우울제를 먼저 시도해 보기로 했다. 사실 '내가 그 정도인가?'라는 의구심과 무지함은 '천연 항우울제로도 충분히 나아질 것 같은데'라는 자신감을 주었다. 또한 에린이 알려준 다양한 인지 행동 치료법들에도 믿음이 있었다. 우울증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일상생활을 바꾸는 것인데, 인지 행동 치료법들이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행동 활성화 일지도 작성하고, 근본적 수용법도 연습하고, 좋은 수면을 위해 노력 하자, 점점 규칙적인 생활과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우울증의 여파로 에너지 레벨이 낮고 무기력한 것이 문제였다. 에너지를 200프로 끌어올려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느낌이었다. 늘 힘이 달려서 숨이 헐떡거렸다. 그래서 천연 항우울제를 먹어서 에너지 레벨을 높이는 것이 내 목표였다.
여러 가지 천연 항우울제 중 나는 비타민 B와 오메가 3를 먹어보기로 했다. 가장 친숙했고 우울증 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하루 한 알씩 먹었고, 효과를 느끼기까지 한 달 정도는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천연 항우울제이다 보니까 처방받은 항우울제보다는 더디게 효과를 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꾸준히 일상생활 습관을 바꾸는 노력을 했다. 행동 활성화 일지를 작성해서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요가를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가고, 카페에 나가서 글을 쓰고, 건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 친구도 만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미사도 갔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났다. 어쩔 줄 모르는 기쁨에 날뛰거나 베실 베실 실없이 웃고 다니거나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보이는 정도로 행복하지는 않지만, 하루하루를 사람답게 살기 위해 에너지를 200프로 끌어다 써야 하는 느낌은 아니다. 아침에 늦지 않게 일어나고, 운동을 하고, 집 밖에서 나와서 활동을 하고, 집중해서 일을 하고 글을 쓰는 일은 여전히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래고 설득해야 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지만, 예전처럼 침대와 물아일체 된 채로 '하기 싫어 미치겠다'라고 징징대지는 않는다. 아마도 습관이 붙은 것일 수도 있고, 비타민B와 오메가 3가 내 기분과 에너지를 향상해 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둘 다 일수도 있다.
가끔씩 기분이 다운될 때는 비빌 언덕이 있다는 든든한 느낌도 든다. '기분이 왜 다운됐지? 아 맞다, 비타민 B 하고 오메가 3 먹는 거 깜빡했다' 면서 내 처진 기분에 대한 책임을 단순하고 빠르게 전가할 수 있어서 좋다. '이제 먹었으니까 괜찮아지겠지?' 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좋다.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예전 같았으면 '젠장 기분이 또 요지경이네, 난 이제 망했다'라고 꼼짝없이 누워서 당하거나 축 처진 기분에 몰입했을 텐데, 이제는 탓하고 기댈 수 있는 외부 대상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그리고 더 이상 실체 없는 패배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내가 성취한 것들, 내게 온 기회들, 누리고 있는 현재에 큰 감사를 느낀다. 인생의 목표가 생겼고, 앞으로 만들어갈 미래가 기대되고, 한 개씩 이루어나갈 꿈들에 설레기도 한다. 나를 침잠시켰던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닌 내가 만들어낸 불안감과 두려움을 깨달았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창조해 낼 에너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창조해 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온 힘을 다해 나를 달달 볶고 몰아세우고 땅으로 곤두박질하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그 힘을 나를 솟아오르게 만드는 데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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