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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Jun 06. 2022

2 day : 운동은 장비 빨

쉼을 위해 걷습니다

'00은 장비 빨'이란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다.
나는 이 문구에 동의하지 못하는 "실력이 우선이어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부류였다.

아주 최근에서야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 과거에도 요가나 헬스에 도전하며 각 트레이닝에 맞는 차림새와 전문적인 도구들을 구매한 적이 있었다.

운동복부터 시작해서 신발, 손목 보호대나 식이요법을 위한 단백질 셰이크 분말과 텀블러까지.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어야 마음이 편했고, 그만큼 돈을 들여야 열심히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고 집 한 귀퉁이에 자리 잡거나 중고물품 판매 사이트에 올라가 다른 이의 건강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일쑤였다.




우선 나는 나에게 맞는 운동인지, 어떤 물건이 진짜 나에게 필요한 건지 잘 알지도 못한 채 '갖춰진' 모습을 중시하며 운동에 임했다. 정작 마음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미용을 목적으로 한 운동이었기에 작심 3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초 체력도 없었고, 끈기도 없었으며, 목적에 금방 도달하지 못하면 실망하고 포기하곤 했었다.

그렇게 자꾸 실패하다 보니 운동은 나와는 멀게 느껴진 건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그런데 최근의 나는 달라진 점이 있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는 행위를 '운동'보다는 '걷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것이다.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한 탓 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모든 게 좋지는 못했다. 마음은 편했을지라도 사실 몸은 그렇지 못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몸이 아직 적응을 못한 것도 있었지만, 맨발에 크록스 차림과 통풍이 너무 잘 되다 못해 양 허벅지 안쪽이 쓸리는 치마를 입고 나갔던 것이 큰 실수였다.

발바닥과 허벅지가 아파서 하루 종일 신경 쓰였고, 내일은 무엇을 입고 무엇을 신어야 할지 고민하는 하루였다.

사실은 얼마나 내가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또다시 운동복과 운동화부터 구매하는 방법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가자마자 신발장과 옷장을 뒤엎었다. 오래되었지만 굽이 닳지 않은 운동화와 편한 티셔츠, 그리고 통풍이 잘되고 시원한 여름용 냉장고 바지를 꺼내 들었다.




나름의 준비물들을 장착하고서 걸으며 첫날과 확연히 다른 나의 걷기 컨디션을 느꼈다. 발이 편하니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었고, 허벅지가 쓸리지 않아 걸음걸이도 훨씬 편안했다. 정신적인 만족감에 신체적 만족감까지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내 장비는 수년 전에 구매하고선 잘 신지 않았던 오래된 운동화 한 켤레와 시원한 냉장고 바지다.
누군가는 '장비 빨'이라고 하기엔 너무 간소한 것 아니냐라고 물을 수 있지만, 그런 질문을 듣는다면 나의 첫날 복장에 대해 설명해주고 싶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갖춰진 채로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남이 무엇보다 가장 큰 만족이었고, 그로 인한 금전적 소비도 없었다.

쉼을 위해 걷기로 해놓고 또다시 강박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서 가지고 있는 걸로 시작해보자라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살아가며 비슷한 사례들이 종종 있었다. 무언가를 배우기 전에, 혹은 시작하기 전에, 내가 준비되어 있는지부터 살펴보느라 지레 겁먹고 도전조차 하지 못하거나 준비 단계에서 너무 힘을 뺀 나머지 금세 지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번 계기로 알게 되었다.
진정한 '장비 빨'이란 내게 맞지 않는 것을 버릴 줄 알고 수준에 맞지 않는 것들을 착용치 않아야 한다는 것.

익숙한 것들에서부 시작되어 점차 초급자의 장비에서 중급, 고급을 밟아 나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내게 소비가 아닌 충전의 의미 여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장비들을 갖추고 나서 다시 아침이 오면,
나는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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