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생일이었다. 마흔이 넘으면서 생일이 기쁘지 않다. 다소 부담스러운 날이다. 흰머리가 더 늘어나고 뱃살이 더 처지리라 경고하는날인 듯싶다.
근데 애들이 선물로 모자를 사주겠다고 한다. "어 그래..." 며칠 후 비 오는 날 우르르 몰에 갔다. 나의 10년 넘은 최애 야구 모자가 넘 흉했나 보다. 짙푸른 라지사이즈를 함께 골랐고 아이들 사인을 안쪽에 받았다. 모자를 보고 쓸 때마다 뿌듯하다.
얼마 전 반가운 이메일을 졸업생에게 받았다. 해외 파견을 끝냈고 유학을 앞두고 있는데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장학 재단 면접을 앞둔 터라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고 함께 교내 식당으로 향했다. 졸업 후 생긴 식당 밥이 넘 맛있다는 옛 제자의 웃음 섞인 푸념을 듣고 함께 웃었다.
자식이든 제자든 인생의 열매이다. 기저귀를 수백, 수천 개를 갈 때 모자 선물을 기대하지 않았다. 학생들 매시간 눈을 마주하고 틈틈이 면담을 할 때 졸업 후 연락이 올 줄 몰랐다.수년이 지나서야 그 관계의 열매가 나의 시간을 뿌듯하게 한다.
우린 자판기 인생살이에 익숙하다. 적어도 20세기와 21세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인생의 목표(제로 콜라)를 정하고 노력과 재능(1000원)을 투입하면 나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다 배운다. 그게 뜻대로 안 되면 헬조선(고장난 자판기)을 찰지게 욕하거나 못난 자신(불량 지폐)을 한없이 탓한다.
그런데 인생이 자판기와 같던가? 투입 대비 산출이 바로 나타나던가? 나의 애쓴 하루가 기쁜 내일을 보장하던가? 경우에 따라 다르다. 맘 잡고 한 학기 공부하더니 다음 학기 성적이 수직상승한 학생이 있는가 하면, 속 썩이는 자식을 두고 수년 동안 애쓰지만 여전히 속상하기만 한 부모도 있다.
더구나 단시간 확보한 성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빨리 내 맘을 달래고 떠난다. 오래 걸린 열매는 그만큼 머물며 동행한다. 그러기에 열매의 대다수는 관계이다. 부부, 가족, 친구, 이웃, 동료, 사제, ... 그 열매가 진정 우리 갈증을 해소하지 아니하던가. 나무 인생은 앞으로 마주할 열매를 생각한다. 언제 어떤 열매가 매달릴지 모르지만 불안하지 않다.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