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성에서 우수하다는데 노인성은 보고 그렸을까.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은 노인성(老人星), 수성(壽星)이라고 불리고 서양식 이름은 카노푸스(Canopus), 용골자리 알파별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는 남쪽의 제한된 지역에서 남쪽 끝에 걸려서 보이기 때문에 남극노인성이라고 부르며, 이 별을 세 번 본 사람은 무병장수한다고 하여 수성(壽星)이라고 부를 만큼 행운의 별로 그만큼 보기 어려운 별이다. 한반도에서는 제주도 남부, 서귀포까지 내려가야 겨우 보인다. 그래서 서귀포에는 삼매봉이라는 곳 정상에 남성대(南星臺)라는 지명이 있다.
고려 무신정변이 발생한 1170년 초 서해도 안렴사 박순하라는 사람이 남쪽에서 밝게 빛나는 별을 발견해 이것을 노인성이라 여겨 의종에게 보고했는데 의종이 이를 기뻐한 나머지 과도한 제사와 잔치를 벌여 무신정변을 맞이하게 된 간접적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때 박순하가 노인성을 보았다는 말은 당연히 거짓이다. 서해도는 개경과 거의 위도가 같으며 이곳에서는 고려시대 때 카노푸스가 남중을 하여도 지평선 밑에 있기 때문에 절대 볼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의종은 가짜 수성(壽星)을 뒤쫓다가 단명하고 만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논하기 전에 노인성에 대하여 먼저 소개한 이유는 천상열차분야지도에도 노인성이 표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같은 형태의 천문도는 중심을 북극으로 하여 반구 형태의 하늘을 평면화한 것인데, 적도보다 아래에 위치한 별들은 천구가 남극을 향해 모여들기 때문에 남천(南天)에 위치한 별의 위치와 모양은 당연히 왜곡되게 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어항 같은 유리 항아리와 같은 모양의 하늘을 입구 쪽에서 들여다보면서 이것을 원판에 2차원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면을 평면의 원판에 그렸기 때문에 바깥 테두리 쪽에서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에게 충분히 인식되어 있다. 고등과학원의 박창범 박사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별자리 그림은 평면에 실제보다 크게 그렸기 때문에 몇 개의 별이나 춘・추분점과 같은 소수의 기준점만을 이용해서 관측 연대를 추정하면 커다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통계적인 방법을 동원했다고 한다. 나일성 교수는 “별자리의 배치나 적도와 황도의 교점[좌표상의 춘분점과 추분점] 등과 같은 외형상의 변화를 보고 천문도의 제작연대나 별들의 위치의 기산점(起算点 [原點])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단정한 바 있다. (출처 : 구만옥, '‘天象列次分野之圖’ 연구의 爭點에 대한 檢討와 提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정밀성에서 우수하다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어떤 천문도보다 우수하다는 것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같은 구조의 원형 평면에 그린 다른 천문도라면 똑같이 가지고 있을 구조적인 핸디캡을 감안하여 캘리브래이션(Calibration)하고 동일한 핸디캡을 가지면서도 어떤 부분에서 별들의 위치를 실제 위치와 유사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별자리의 왜곡이 많지 않을 북천 하늘보다는 매우 왜곡되어 있는 남천 하늘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별이 바로 카노푸스, 노인성이다.
아래는 천상열차분야지도(목판본)에 그려진 노인성의 모습이다. 붉은색 박스로 표시하였다.
위쪽에 있는 파란 박스에는 노인성에 버금가도록 밝게 그려놓은 낭성(狼星), 즉 시리우스가 표시되어 있고, 그림 상단에 오리온자리인 삼수(參宿)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가장 비교되는 천문도가 1247년 중국에서 제작된 소주(순우)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보다 150여 년 앞서 있는데 이 천문도에는 어떻게 표시되어 있는지 보자.
붉은색 실선에 화살표로 표시한 별이 위쪽은 낭성, 아래가 노인성이다.
더불어 삼수에 위치한 오리온자리 알파별 베텔기우스(Betelgeuse), 카파 별 사이프(Saiph)도 녹색 화살표로 표시해 보았다.
두 쌍의 별 들은 천문도의 원형 평면의 중심, 즉 북극에서 그은 직선에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위 두 천문도가 북극을 중심으로 한 원형 평면이기 때문에 북극을 자나는 반지름선은 당연하게도 적경선이 된다. 같은 적경선에 위치한 별들은 쉽게 말하면 동일한 시각에 뜨고, 동일한 시각에 남중하고, 동일한 시각에 지는 별들임을 뜻한다.
시리우스(천랑)와 카노푸스(노인)는 별들 중에서는 1,2위를 다투는 밝은 별들이므로 다른 별들은 몰라도 이 두 별은 천문도에 점을 찍을 때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좌표의 정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자.
소주 천문도와 다르게 노인성과 낭성이 같은 적경선에 위치해 있지 않고 간극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수에 위치한 베텔기우스와 사이프는 거의 동일 적경선상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위 천문도들을 제작할 당시 남천 하늘에서 시리우스와 카노푸스의 위치는 어떠할까.
아래는 1247년 소주에서 관측되는 모습이다.
왼쪽 상단의 North Celestial Pole 은 하늘의 북극을 말한다. 즉 위 두 천문도와 동일하게 북극에서부터 그은 실선이 적경선이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리우스와 카노푸스는 유사한 적경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오리온자리의 베텔기우스와 사이프도 마찬가지다.
지구의 세차운동 때문에 하늘의 북극이 바뀌면 동심원의 중심이 바뀌기 때문에 선들의 위치도 바뀌게 된다. 이렇게 세차운동에 의해 두 별의 적경선이 일치하였던 적이 있는데 아래 그림과 같다.
1036년 7월 7일 우리 시간으로 새벽 3시 39분이다. 공교롭게도 이때 오리온자리의 베텔기우스, 사이프의 적경선도 일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관측한 사실을 바탕으로 천문도를 그렸다면 완전히 일치되는 적경선에 두 별의 점을 찍어야 한다.
그렇다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한 1397년의 하늘은 어땠을까.
적경선의 간극이 더 벌어졌고 천상열차분야지도에 표시된 것과 다르게 카노푸스가 시리우스보다 더 서쪽(오른쪽)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려 150년 전의 천문도에서는 적경선에 일치하여 제대로 그린 것을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는 제대로 그리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주 천문도에서는 노인성을 보고 그렸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카노푸스는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까지 그 어느 때에도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별이다. 따라서 카노푸스의 별 위치는 정확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추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소주천문도가 만들어진 남송 시절부터 조선이 건국한 14세기 말까지 150여 년 동안은 원나라의 곽수경이 수시력을 만들어 당시 부마국이었던 고려에 역법을 반사하기도 하는 등 동양 천문학사의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던 시기이다. 비록 여말선초의 한반도에서 노인성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부마국으로서 간접적으로 중국에 진출할 수 있었던 시기도 있었기 때문에 노인성의 천구 좌표 정도는 충분히 입수할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말선초는 노인성의 정확한 좌표가 어디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학문적으로 무지하고 교류가 없는 사회였던 것이다.
과학적이고 정밀성에서 우수한 천문도라고 주장하려면 이 정도 '기본'은 해야 되는데 고작 밝은 별들을 좀 더 크게 그려서 과학적이란 말은 좀 유치하지 않나 싶다.
다른 천문도들은 어떠할까.
1800년 전후에 제작되었고 종대부(宗大夫)가 있어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일본의 도야마현 천문도를 보면서 마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