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지금은 봄이야?
엄마, 지금은 봄이야?
아니, 여름이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럼, 가을이 오면 2026년이야?
아니, 산타할아버지가 오고 여섯 밤이 지나야 2026년이 돼.
셋째가 물었다. 지금은 봄이냐고 여름이라고 일러주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헤아리더니 가을이 오면 2026년이 되는 건지 묻는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많이 많이 지나면 이천이십백 년이 되냐고도 묻는다.
이천이십백 년은 없고 이천백 년은 있다고 일러주며 아마도 너희는 그때 살아있을 수 있겠다. 엄마는 없겠지만 했더니 엄마도 있을 수 있지란다. 그러면 백이십 살일 텐데.. 아,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
이천백 년에 살아있으려면 과하게 건강해야겠다. 그럴 리 없겠지만 아이에겐 가능하고 내겐 불가능해 보이는 미래가 그래도 아주 먼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2000년이 된다며 들떴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대학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밀레니엄이라는 새해를 기다리며 우리는 기계의 오류나 전산 장애 같은 일이 터지지 않을지 걱정했다. 2000년 1월 1일에 나는 서울에 있는 사촌 언니네에 갔었는데 서울역 앞을 지나다가 SBS 뉴스에 나왔다. 카메라가 내 앞으로 오더니 새해를 향한 기대를 물었고 대학을 간다는 말에 기자는 남자친구도 생기면 좋겠다는 말을 부추겼다. 그렇게 나는 밀레니엄보다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신입생으로 뉴스에 나왔다. 이름은 김은의가 아닌 김윤의로 지금은 찾을 수도 없는 영상이 되어..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2000년대가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2025년에서 1900년대를 살아온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간다. 아이가 말한 2100년은 또 얼마나 달라질까. 지구온난화, 기후위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될 것 같은데 이전에 없던 세계를 인간들이 만들어 낼지도 모를 일이다.
1900년대와 2000년대라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10대에서 20대가, 다시 30대에서 40대가 되며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전에 겪지 못한 경험은 다른 모습을 부여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새 사람이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벽이 되기도 한다.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는가라고 종종 묻는다.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말이다. 계절은 돌아와도 같은 해는 없는 것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 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달라지는 건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아이가 봄이냐고 묻던 날에서도 시간이 흘러 지금은 가을이 되었다. 매년 여름이 길어지니 어느 해 보다 긴 여름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기다렸던 가을인가. 그런데 바람의 온도가 달라짐을 피부로 느꼈던 저녁나절의 첫 바람은 반가움보다 서글픔이었다. 아, 곧 겨울이겠구나. 겨울이 오면 해는 가겠구나는 라는 생각이 촌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세월에 익숙해진 사람이 되었다. 변화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된 것 같다.
산타는 어째서 지는 해의 끝에 찾아오는 걸까. 아이가 있는 집에는 연말이면 설렘이 가득하다. 가는 해를 향한 아쉬움이 없고, 오는 해를 향한 부담도 없는 아이가 가까이에 있다. 서글픔은 아쉬운 것이니 서글픔을 거두고 생경한 사람이 되어 내일을 기다리면 좋겠다. 누군가의 말처럼 행복한 할머니를 꿈꾸며 말이다. 그렇게 산다면 내일이 이천백 년이라고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