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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몬숲 Jun 04. 2024

무지개가 떴다.

산방산 둘레길


산방산 둘레길을 걷는데 비가 왔다. 엄청 쏟아지는 비가 아니고 보슬보슬 싸리싸리 내리는 비이다. 어차피 오래 걸으면 땀으로 젖을 테니 오히려 좋았다. 비가 한참 내리더니 구름이 개었다. 개인 구름 옆으로 엄청 큰 무지개가 떴다. 


평지에서 바라보는 산은 거대하고 아득하나 하늘에서 바라보는 산은 아름다운 경치이다. 


나의 출생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였다. 여자를 경시하는 집안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 사랑받게 되면서 받은 사랑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니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만큼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일 뿐이었다. 나의 무의식 속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가 있었다.


애어른으로 자란 나에게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캐서린 길디너의 <생존자들>에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어떤 게 정상적인 행동인지 눈치로 파악한다.

2. 자신에 대해 가혹하게 평가한다. 

3. 재미있는 시간을 갖는 데 어려움이 있다.

4. 매사에 너무 심각하다. 

5. 친밀한 관계를 어색해한다.

6. 자신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변화에 과민 반응한다. 

7. 끊임없이 인정받고 확인받고 싶어 한다.

8.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9. 책임감이 지나치다.

10. 상대방은 그럴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증거가 뻔히 보이더라도 철저하게 의리를 지킨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못했고 나를 보호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1만 달란트를 탕감을 받았으니 100 데나리온을 용서해줘야 하는 논리였다. 냉혹한 자기비판은 확실한 것, 일관성의 덫을 놓고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기능을 마비시켜 두뇌를 질질 끌고 다녔다. 뇌 질환의 원인은 스트레스가 아니던가. 머릿속에 반짝이들이 따끔 거리며 나의 건강한 시놉시스들을 빠개고 있었다. 정작 매일 내가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존재가 나임에도 세상에서 어떤 '기능'을 할지를 생각했다.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편으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면서 사랑받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 것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나는 왜 '나'로 태어났을까? 분명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면서도 인도하시는 이가 있으니 믿었다. 그러나 왜 존재해야 할까? 에 대한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인생은 행복보다 고통이 더 많고,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은 것 같은데? 하나를 해결하면 하나를 또 해결해야 하는데? 간혹 있는 행복들에 인생을 계속 살아가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괴로운 순간들의 원인을 찾다 보면 또 괴롭고 괴로우니 또 괴롭다. 


'일관성'이라는 허상은 현재에 기생하여 산다. 과거나 미래에 허비하는 모든 순간들의 연료는 현재이다. 바운더리를 설정하고 그럴 만한 사람에게 그런 이해심을 베풀라는 것은 어떻게 이웃사랑과 연결될 수 있을까? 인간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숨 쉴 공간이 생겼다. 인간은 악하구나. 악이란 정말 존재하는구나. 내가 애써 아니라고 생각해도 악은 악이구나. 머릿속에 '이해해야만 하는 귀신'이 떠나가는 것 같다. 다 알고 싶은 마음과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 버거웠다. 그러나 내가 다 알지 못해도 행복하기에는 충분하다.


나는 어떨 때 가장 몰입할까? 창의적이고 독립적이고 멀티가 가능한 직업일 때, 마음을 채우고 영혼을 따뜻하게 하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 좀 더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고 정신적으로  자극을 주는 배움이 있는 곳이 어디일까? 시작하지 못하는 두려움의 기저는 무엇일까? 원칙과 두려움이 아닌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의도적으로 선택하며 살 것이다.



당신과 나의 새로운 날들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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