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랬지, 하늘 아래 같은 레드는 없다고. 네 화장대를 보자마자 그 말의 뜻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어. 복잡한 단계의 스킨케어 제품과 색조 화장품이 끝없이 줄지어 서 있던 그 화장대 말이야. 왜일까. 로션, 선크림, 투명한 립밤이 전부였던 내 화장대 대신 휘황찬란한 올리브영 매대가 먼저 떠올랐어. 성년의 날, 너는 내게 장미꽃 한 송이와 짙은 코랄빛 립스틱을 선물했지. 자그마한 편지에는 우선 이것부터 시작해 보자는 말이 적혀있었어. 너와 연애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어.
"드레스 코드가 있었는데 내가 깜빡했더라고."
어느 날 저녁,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어. 약속시간을 놓쳤나 당황한 내 손에 덥석 쥐여줬던 커다란 쇼핑백, 기억해? 저녁 식사 자리에 드레스 코드까지 정하는 친구들이라니, 어쩐지 너의 화려한 화장대를 닮은 친구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스팽글이 촘촘히 박힌, 몸에 딱 달라붙던 블랙 원피스와 실버 스틸레토 힐. 21년 평생 입어본 적도, 관심 가져 본 적도 없던 스타일이었지만 반짝이는 네 시선을, 나는 차마 모른 채 할 수 없었어. 통통한 파우치에서 꺼낸 네 화장품들로 내 얼굴을 공들여 물들이는 동안에도 나는 숨 한 번 쉽게 내뱉지 못했어. 내 볼에, 콧망울에, 입술에 닿았다 떨어지는 네 손길이, 네 시선이 뜨겁고 황홀해서 어지러웠거든. '오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비스야'라는 네 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를 사랑해'라는 말로 들렸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이제 걱정 마, 언제든 내가 바로 달려올게."
단출한 내 화장대 위에 작고 둥근 카메라를 설치하던 너의 하얀 뒷모습. 너의 다부진 어깨를 보며 나는 커다란 방공호를 떠올렸어. 24시간, 1분 1초도 놓치지 않고 목숨 바쳐 나를 지켜줄 준비가 되어 있다던 너의 뜨거운 고백. 뼈까지 모조리 타버린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네 품에서라면 그렇게 죽는 것도 좋을 것 같았어. 그 네모난 세상이 네가 만든 새장인 줄도 모르고 철없이 행복한 날들이었지. 그 모든 영상이 너의 붉은 전리품인 줄도 모르고 마음껏 흐느끼고 신음했지. 코발트블루가 아찔하게 잘 어울리는 피부라며 입히기 무섭게 끌어내렸던 어깨끈. 볼에서 목으로,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가슴으로 차례차례 스치던 매서운 입술. 그 날 네가 내 몸에 남긴 건 키스마크였을까, 낙인이었을까.
"나한테 이 정도도 못 해줘?"
길 잃은 강아지 같던 둥그런 눈망울. 내게 실망했다는 그 찰나의 표정을 보는 게 무섭고 두려웠던 날들이었지. 차라리 네가 불같이 화를 내거나 매몰차게 내 손길을 뿌리쳤더라면 모든 게 달랐을까 가끔 생각해. 낯선 체위와 도구들 앞에 주춤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며 너는 습관처럼 말했지. 아연실색한 내 표정은 안중에도 없이, '아직 네가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로 시작하던 뻔한 레퍼토리들. 아픈 게 아니라 좋은 것, 이상한 게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라고 했던가. 내가 어린 나이에 다른 사람이 아닌 널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축복인지 모를 거라고도 했어. 매일 천국을 보여주겠다고 했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손목을 조여오던 케이블 타이의 서늘한 감촉도, 허벅지 안쪽을 할퀴는 채찍의 뜨거운 마찰도 무지가 깨어지는 순간이자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 길이라 믿었던 건 너의 세뇌였을까, 나의 결정이었을까.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이해하겠어."
그 언젠가부터 나는 까다롭고 힘든 아이가 됐지. 성질 예민하고 고약한 나를 받아줄 세상은 없다고, 지루하고 심심한 것 투성이인 내 삶을 궁금해할 사람은 없다고 말하던 네 입술을 기억해. 더없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얼굴로 용서하듯 나를 쓰다듬던 네 손길을 기억해. 너와 내 사이에 너만 존재한 지 오래였을 텐데, 나는 왜 그 모든 순간들조차 사랑이라 여겼을까. 나는 왜.
너와 내가 연애를 시작한 지 꼭 일 년째 되는 날이야. 너는 오늘 내게 새하얀 꽃 한 송이를 건네겠지. 너의 표정이 궁금해. 네가 저열한 웃음을 짓든, 서럽게 눈물을 흘리든, 냉철하게 표정을 숨기든 사람들은 네가 아닌 나를 구경하느라 바쁘겠지. 불을 꺼 줘. 이제야 내게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