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인연이 아닌가벼
쨍그랑.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이 소리는 작은 접시나 찻잔 정도가 깨지는 소리가 아니다.
헐. 그 순간 내 뇌리를 스치는 불안했던 접시가 떠올랐다.
설마... 설마...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하며 이불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
악~~~~~~~~~~~!!
나는 악 소리만 내고 있었고 아들은 구월이에게 "구월아 괜찮아?"를 외치고 있었다.
접시가 깨졌다.
그것도 내가 가지고 있는 접시들 중 가장 큰 접시 2개가 모조리 한꺼번에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욕실로 와다다 뛰어가며 외치던 아들의 목소리 "윽~~ 구월이 오줌 밟았어"
다다다다 뛰어가던 그 발소리 뒤에 바로 쨍그랑 와장창 소리가 났으니 이 놈이 깨금발로 뛰어가면서 분명 그 접시를 건드렸을 테지.
가뜩이나 늘 위태로웠던 접시는 그래도 그 자리가 최선이라며 억지로 세워둔 꼴이었으니 작은 충격만 가해져도 아래도 미끄러질 만하게 간당간당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백 프로 나의 불찰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젠 많이 컸으니 이런 오두방정은 없을 거라 믿었던 것도 내 불찰이요, 불안 불안하면서도 그 상태를 유지시키고 있던 것도 나였으니) 아들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하는데, 산산조각이 난 유리조각을 치우면서 손인지 마음인지 아무튼 뭔가가 떨리고 있었다.
아... 이게 얼마짜린데..... 하다가 이내 이거 구하느라 기다리고 마음 졸이며 힘들게 구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다시 구할 수도 있지만 그때 내가 접시를 향했던 열정은 그때뿐이었으니 같은 접시를 구한다 해도 결코 같은 접시는 아니리라.
그렇다면 없어도 되는 접시냐. 없어도 되긴 하지만 나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니 이 복잡 미묘한 심리를 무엇으로 돌려놔야 하는지.
백만 원을 순식간에 해먹은 아들놈은 엄마 내가 사줄게 했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니가 사준다면 받을 거야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마음이란 게 그런 게 아니잖아.
나는 접시가 그리운가 지난 나의 열정이 그리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그냥 그때 그 열정으로 내가 산 그 접시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매 년 찾아오는 봄이 매 년 같은 봄이 아닌 것처럼, 그때 그 접시는 이제 내 곁으로 올 수가 없다.
이상하다.
몇 년 전 구하기 어렵게 구한 엔틱 '로열 크라운더비 이마리' 찻잔을 다섯 살이었던 아들이 깼을 때는 이 정도의 마음이 아니었다.
그 작은 찻잔이 25만 원이었으니 그에 비하면 이번에 깨진 대왕접시가 50만 원인 것은 비싼 것도 아닌 셈이다.
그러니 가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는 또 바로 사서 빈자리를 채워뒀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선뜻 접시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지가 않다.
그저 지나간 접시에 대한 미련만이 남아서 마음이 힘들 뿐이다. 아마도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는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문득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찌릿한데, 똑같은 것으로 다시 채워놓으면 괜찮아지려나?
깨진 유리조각을 말끔히 치우고 아들과 백화점엘 갔다.
깨진 그릇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들어오니 한결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그런데 잠시 지나니 다시 그 그릇의 잔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또 몇 년 전 명품 클러치백을 통째로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 안에 든 것만 해도 결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는 여전히 가진 것들을 쥐고 살 때라 잃어버린 백을 열흘이 넘게 아쉬워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마치 도인이 된 것 같긴 하다.
아무렇지 않을 수는 당연히 없지만, 그때에 견주어볼 때 확실히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한 게 분명하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깨진 접시를 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자리를 쳐다보며 그리워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다시 똑같은 것으로 채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어렴풋하게나마 해본다.
모든 것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억지로 붙잡아두려는 인연은 진짜 인연이 아니라서 언젠가 어떻게든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고야 만다.
내가 가지고 있어서 가장 뿌듯했지만 나와는 인연이 안 되는 접시를 조용히 보내줘야지 생각한다.
사실은 너무 커서 실용적이지 않았다고 툴툴대기라도 하면서 말이다.
다시 언젠가 여전히 그리워서 못 견딜 때면 그때는 다시 또 데려오겠지.
사치가 아닌 필요에 의해서이길 바랄뿐이다.
그릇에 진심인 사람들은 나의 이 쓰린 마음을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