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가 찾아왔다
새로운 수영장으로 이동하면서 평영반을 다시 복습하기로 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발차기와 호흡 타이밍도 자리가 잡히면서 자세 교정이 된 듯했다. 앞으로 쭉쭉 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선생님이 격하게 해 주시는 칭찬은, 수영 경력 7개월 차 고래를 춤추게 했다. 물속 세상에서 허둥대던 내 팔다리가 점점 적절한 위치와 타이밍을 찾아가는 걸 느끼는 것, 수영을 배우게 하고 지속하게 하는 의욕은 거기서 생기는 것이었다. 흐르는 땀의 불쾌함 없이 주 3회 숨차게 헤엄치는 생활 7개월째, 겨울의 추위가 다가오고 있었다.
으슬으슬 추위에 떠는 느낌을 너무 싫어하는 나는, 겨울이라는 계절이 내 수영의 고비가 될 것임을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온난화의 영향이 더 크게 느껴진 올해에는 11월 말까지도 두꺼운 겨울 외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추위가 늦었다. 아침에 쌀랑한 기운을 느끼면 수영장으로 나서기 전 얼마간 내면의 갈등을 느끼곤 했지만, 수영하고 나와서 올려다보이는 깨끗한 하늘과 상쾌함을 떠올리면 주저스런 마음을 수영장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또 웬일인지, 든든하게 껴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분명히 보이는데, 나는 그다지 춥지 않게 느껴졌다. 날씨가 예년보다 너무 안 춥기 때문인가? 아니면 운동이라곤 몰랐던 내가 규칙적으로 수영을 하면서 체온이 올라갔나? 12월 초까지도 여전히 수영하고 나오는 나는 반팔차림이었는데, 운동을 하면서 추위를 덜 타는 체질로 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뿌듯함을 즐기기도 했다.
그렇게 추위라는 장애물을 부드럽게 넘기던 나에게 수영의 고비는 예상치 못한 데서 찾아왔다. 접영이 시작되면서 웨이브 연습, 한 팔 접영, 양팔 접영의 단계로 진행되었는데, 아직 발차기 타이밍이며, 물 잡기가 안되고 있는 탓인지 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내 팔다리는 물을 상대로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내 사전에 대충이란 게 없는 나는 학생시절부터 출석의 성실함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니, 팔이 아프다고 수영장을 안 갈 사람이 아니었다. 신기한 것은, 물에 들어가서 수영을 할 때는 물의 부력 때문인지 통증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몸을 사릴 줄도 모르고 의욕적으로 팔을 움직이고 다시 중력의 영향을 받는 뭍으로 나오면,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게다가 머리로 이해한 동작이 실제 몸으로는 안 되는 상황은 뿌연 안개 같은 스트레스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접영이라는 최고봉 앞에 선 '서툴고 미숙한 나'는 수영 열정이 넘쳐나던 나를 '하기 싫은 나'로 서서히 잠식해가고 있었다. 나란 인간은 정말, '못하는 것, 미숙함'에 대해 이렇게 예민하구나.
"살살해. 수영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수영하다가 통증이 만성이 돼서 아예 못하게 된 사람도 있던데."
남편의 걱정스러운 말은 고맙기보단, '중도 포기'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맴돌게 함으로써 내 수영을 위협하는 악마의 유혹처럼 느껴졌다. 나도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수면을 날아다니고픈데, 접영이라는 허들은 나에게 역시 너무 높은 것인가. 슬그머니 내 안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날씨도 추운데, 겨울 동안 쉬고 따뜻해지면 다시 시작하면 어때? 그동안 팔도 나아질 테니.'
악마의 속삭임 같기도 하지만, 몸을 챙길 필요도 있는 게 사실이지. 조만간 오리발도 사야 할 텐데 오리발 사놓고 그만둘 순 없으니 지금 멈춰? 자유형의 고개를 넘어온 나이건만, 또다시 가로막힌 벽 앞에서 의욕이 꺾여가는 내가 보인다. 잘 안 돼도 그냥 꾸준히 하다 보면 된다지만, 2주가 넘도록 일상에서 통증을 느끼는 건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어라, 잠깐. 내가 지금 안 할 이유와 핑계를 찾고 있는 건가?
성실한 나도 다시 반기를 든다. 이쯤 되면 천사와 악마가 싸우고 있는 셈이다.
천사: 뭐든 시작이 어려운 내가 지금 그만두면 다시 수영을 하긴 하겠어? 좀 더 버텨봐.
악마: 그러다 진짜 다쳐서 나중에도 못하게 되면 어쩔래? 이럴 땐 몸도 사릴 줄 알아야 해.
천사: 그렇지만, 수영 동기들 다 잘하고 있잖아? 아직 접영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마구잡이로 힘을 써서 그런 거야. 계속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팔도 괜찮아지지 않겠어?
선택의 기로에서 난 항상 이런 식이다. 온갖 이유와 논리적인 근거를 양쪽에 줄지어 세워두고 마치 차례차례 번갈아가며 겨루고 쳐내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다. 문제는, 양 편에 늘어서있는 수많은 이유와 근거를 요리조리 따져보고, 카운트해서 몇 대 몇 스코어를 내도 결정은 쉽게 일단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까지 머릿속 대결을 생각의 흐름대로 쓰고 있는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한 가지. 양쪽의 내가 겨루기를 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나는 왜 수영을 그만두는 쪽은 악마로, 계속하는 쪽은 천사로 정한 걸까? 계속하는 것은 선량하고, 옳고, 정의로운 편인가? 그만두는 편은 왜 악마여야 하지? 그만두는 게 옳은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배제한 거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계속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수영이 좋으니까? 그러나 좋아하는 것이라도 내 몸이 부서져라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낙오자가 되기 싫어서구나! 난 잘하는 사람, 성공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구나. 나의 무의식은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이렇게 정해놓고 살아왔던 거구나. 지난 과거의 성실하고 모범적인 이미지의 나는 '이상적인 나'를 지켜나가기 위해 강박적으로 나를 채찍질해 온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부상 때문에 수영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만두는 게 옳은 방향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성실하고 성공하는 나'만 천사일 수 없고, '포기하는 나, 실패한 나'도 무조건 악마일 순 없는 것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왜 난 천사여야만 하지? 악마일 수도 있잖아?……
수영을 한가운데에 두고, 나는 나를 관찰하고 있다. '수영하는 나'와 '글 쓰는 나'가 만나 무의식의 나를 발견하고 있다. 글쓰기는 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내 머릿속 생각들을 가지런히 풀어내놓는 동시에, 그 실 가닥들에 가려져 있던 나의 내면까지 발견하게 한다. 마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고 나면 그 속의 번데기를 만나게 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