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남과 여
" 수영 강사가 여자예요, 남자예요?"
최근 살이 더 찐 것 같다며 넋두리해 대는 동생에게 수영을 추천하고 있는데, 옆에서 튀어나온 제부의 첫 반응이었다. 동생 부부와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나는 운동의 필요성과 함께 열정적으로 수영 예찬을 해대고 있었다. 정말이지, 나조차도 운동기피자에서 수영예찬론자가 된 나 자신이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암컷을 사수하려는 수컷의 본능인가? 여자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하는 가부장적인 남자들의 보수적인 생각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방증인가? 최대한 양보해서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남편이 수영을 배우는데 강사가 여자라면 나도 마찬가지로 경계하게 될 문제인가? 아내의 수영 강사가 남자인지를 묻는 저 한마디는 정말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몇 달 전 남편의 첫 반응도 별다르지 않았다. 수영 강습 두 달쯤 됐을 무렵이었나, 결코 숨길 생각도, 일부러 얘기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강사 선생님과 안면도 익고 질문도 하는 수영장 생활이 익숙해지고 나니, 일상을 나누는 대화에서 수영장 얘기를 하다가 남자 강사가 언급되었나 보다.
"강사가 남자야?!"
아내의 일상을 궁금해하는 법 없는 무뚝뚝한 충청도 남자가 웬일로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라니. 이 남자도 아내의 주변 남자들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어? 평소에 무관심 캐릭터로 일관하던 남자가 예상치 못한 경계심을 내비치는 모습에, 나의 마음 한편에는 혼자만의 은밀한 흐뭇함과 함께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아이를 낳을 때까지 나의 직업은 반도체 엔지니어였기에 나의 대학 생활, 직장 생활은 80프로 이상이 남자였고, 주변에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것이 나에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직장 생활 동안이나 SNS로 연결되어 있는 남자 동기 이야기를 할 때도 무덤덤했던 남자에게서 묻어 나오는 경계심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왜일까.
"나를 못 믿는 거야? 새파란 스물다섯 살 선생님이 뭐가 아쉬워서 사십 대 아줌마를 쳐다보겠냐고."
수영 선생님의 풋풋한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스물다섯이라는 선생님은, 수영을 가르치는 기술적인 부분 외엔 쑥스러움과 내성적인 성격이 드러나 보이는, 아직은 세상 경험치가 한참 얕아 보이는 순진한 청년 이기었기에 피식 코웃음이 난다.
"강사를 못 믿는 거지! 수영장 강사랑 썸이며, 불륜이 그렇게 많다던데."
그러고 보니, 옮겨온 수영장의 선생님은 40대 중후반으로 내 나이 또래로 보였는데, 아줌마, 할머니 수강생들 사이에서 얼마나 단련이 됐는지 노련한 입담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을 상대하며 살아남으려다 보니, 분위기를 휘어잡고 유머에 위트를 겸비한 화려한 스킬을 장착하게 됐을까. 환갑에 가까운 할머니 몇 분은 선생님한테 은근히 터치를 하기도 하고, 애교스러운 표정을 날리는 등의 행동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털털이 공순이였던 나의 눈은 그런 상황을 목격할 때마다 찌푸려졌으니, 남편한테도 애교스러운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나는 썸이란 걸 탈 위인도 못된다.
수영 영법을 배우다 보면 물속을 허우적거리는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조차 가늠이 안될 지경이니, 다른 데 신경이 쓰일 여유도, 체력도 나에겐 없다. 남편의 말은 어이없게 느껴지면서도 나를 기분 좋게 했는데, 도대체 이걸 어떤 감정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걸까. 흐뭇한 이불킥은 마음속으로 숨기고, 수영을 더더 즐기는 모습으로 뻔뻔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건 마치 결혼 15년 차에 난데없는 밀당을 하는 기분이랄까. 남편과 거리감이 느껴지고, 이젠 남자와 여자가 아닌 가족으로 살고 있는 중년 여성이라면 수영을 배워보는 건 어떨지? 남편의 경계심을 반갑게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지도 않게 많은 분들이 읽어주고 계셔서, 이글을 읽고 불편함을 느끼는 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는 경계 대상이지만 저에게는 삶의 활력소를 주고 계시는 수영 강사님들, 저는 존경합니다. 편견은 편견일 뿐이라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