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연기중
문을 열자마자, 낯선 공기와 함께 질문들이 쏟아졌다.
“어느 빌딩 배정받았어요?”
“오늘 Orientation이세요?”
“무전기 받았어요?”
인사보다, 웃음보다, 질문이 먼저였다.
나는 간신히 “네”만 반복하며 가방을 놓을 곳을 찾았다.
이곳에선 ‘신입’이라고 크게 써 붙이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다 티가 나는구나 싶었다.
사무실은 생각보다 좁았고,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다들 서로를 잘 알고 지내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들 사이, 딱 봐도 "이건 너 거야" 하고 나에게 던져진 책자 한 권.
“여기 이름표 있으니까 달고 계시면 돼요.”
“무전기는 여기서 충전하시고요.”
“스케줄은 다음 주 거까지만 일단 나왔어요.”
그 와중에 Joy라는 직원이 나를 발견했다.
며칠 전 면접 날에도 짧게 마주쳤던, 유난히 밝고 손발이 척척 맞아 보이던 그 여자였다.
그때도 “어, 저 사람은 뭔가 다르다” 싶었는데, 오늘 보니 역시나였다.
누가 봐도 이 건물의 중심 어딘가에 붙박이처럼 섞여 있는 사람.
이름값처럼 밝고 가볍게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Hey, you’re new, right? Come with me.”
그녀는 나를 데리고 복도로 나가더니, 약 카트, 점심 배달 명단, 메모 보드 위치까지 숨 쉴 틈 없이 안내했다.
“생각보다 쉬워요. 시간 맞춰 약만 잘 주면 돼요.”
그 말에 나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쉽다’는 말이 제일 무섭다 생각했다.
왜냐면, 그 말 끝에는 항상
“근데 실수하면 안 돼요.” 가 생략돼 있으니까.
걸어가다 거울을 지나쳤는데, 내 복장이 괜히 신경 쓰였다.
나는 유니폼이 자유라면서도 괜히 페이스북 마켓에서 블랙 스크럽을 사 입고 왔다.
거의 새 옷처럼 빳빳했지만, 괜히 그런 게 더 좋았다.
마치 '나 여기 오래 다닌 사람은 아니지만, 준비는 돼 있어요'라는 식의 인상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실 이 바닥에선 실력보다 이미지와 태도가 먼저일 때도 많으니까.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실수할 것 같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편하게 입어도 돼요. 여긴 복장 딱히 안 봐요.”
Joy는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그 말도 반쯤만 믿기로 했다.
이 바닥에서 “편하게 해요”는 대체로 ‘눈치껏 해요’란 뜻이라는 걸 이미 실습 때 배웠으니까.
점심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오리엔테이션 동기였던 Mavis와 다시 마주쳤다.
서로 각자 도시락을 꺼내고, 동시에 “좀 긴장돼요”라고 말했다.
그 말 하나에 둘 다 웃음이 나왔다.
“자격증 있어도 자리 없다는 사람 많던데, 우리 운 좋은 거예요.”
그녀가 말했을 때, 나는 ‘맞아, 운’이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살짝 위축됐다.
운으로 들어온 사람처럼 보이면 안 되는데. 괜히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식사 후엔 다시 Joy를 따라 스케줄 체크와 약 시간대 메모 정리를 배웠다.
무전기 잡음 사이로 콜벨 소리가 울리고, 직원들 사이에서
"I got it", "Coming" 같은 말들이 오갔다. 그걸 들으며 나는 다시 깨달았다.
여기선 "모릅니다"라는 말보다 "할 수 있습니다"라는 표정이 더 중요하다.
하루가 길었다.
쓸데없이 긴장했고, 사람 이름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고, 돌아갈 버스 생각만 났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내게 “고마워요”라고 했고,
누군가가 “첫날 치고 잘했어요”라고 해줬다.
그 말 한 마디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여긴 익숙한 사람들만 사는 세상 같지만, 가끔은 낯선 나에게도 자리를 내어준다.
물론,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