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흐드러지게 피는 섣달 그믐밤에 고구마 한 바구니를 찌고 엄마는 김치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언니들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가위를 낸 나는 졌다. 고무장갑을 끼고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눈꽃이 집안으로 펄럭이며 들어선다. 소리를 지르는 언니를 뒤로 하고 현관문을 꽝 닫는다.
종종거리며 마당 한편에 선다. 하얗게 덮은 눈을 싹싹 쓸고 뚜껑을 연다. 꽁꽁 싸 메진 비닐을 살살 돌려서 풀어헤치면 살포시 곧게 빚은 김장포기의 맛있는 냄새가 훅 들어온다. 한 포기를 들어 올리면 살짝 얼은 김치 양념이 방울방울 트리처럼 반짝 거린다.
그중에 예쁜 포기를 그릇에 담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김장포기를 살살 어루만지고 비닐을 빙빙 돌려 휘감는다. 비닐을 꽁꽁 돌리고 그 위에 돌을 올린다. 항아리 뚜껑을 덮는다. 김장독 옆으로 보이는 창고에 쌓인 까만 연탄에 하얀 눈꽃이 피어있다.
외풍으로 창문은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계속 들린다. 5남매는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후후 불면서 고구마를 먹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란 고구마에 빨간 김치를 쭉 찢어서 올려놓고 입을 한껏 먹던 고구마의 찐. 맛! 그리고 살얼음 동동 뛰운 동치미는 정말 죽여주는끝내주는 맛이었다.
"추르릅.."
에어프라이에서 고구마를 꺼내어 엄마가 담가준 김장김치를 획 감아서 입에 넣는다.
'음, 올해 김장김치는 젓갈이 많이 들어갔어. 짜다 짜'
'눈을 감는다.'
외풍으로 달그락 거리던 추억의 맛을 떠올려본다. 추억 속의고구마의 찐 맛! 그 추억 속의 맛은 언제나 죽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