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너를 만나기 전 나는 말이야...
2011년 12월. 졸업도 하기 전에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작은 수학학원에 첫 취업을 했어. 사회초년생이 뭘 알겠어. 제대로 된 취업정보도 없이 그저 수학과라는 것과 교수님과 친한 선배가 운영한다는 것, 하나만 보고 교수님을 따라가 취업했지. 취업이 처음이라서, 마냥 설레고 신도 났어. 제대로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이젠 진짜 금전적으로 독립도 하고 왠지 멋진 어른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지. 사회초년생이란 게 그렇게 힘들지 모르고 말이야.
수학전문학원이기에 한 선생님 당 담당했던 아이들은 초1부터 고3까지 너무 범위가 넓었다. 수업은 아이들 하교하고 2시, 3시쯤 첫 수업을 시작해 고3 수업을 마치면 새벽 12시, 더 늦으면 새벽 1시 정도가 되었다. 그땐 밤늦은 수업을 제제하는 기준이 없었기에 시험기간에 새벽 2시, 3시까지 아이들 시험준비를 해주곤 했다. 그 수업준비를 모두 하려면 잘 시간도 부족했기에 새벽에 퇴근하고 나서도 밤을 새워야 했고, 잘 시간은 겨우 2-3시간뿐이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쳐갔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인간관계였다. 잘 시간도 부족했던 나는 주말에도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 게 버거웠고, 매번 나를 챙겨 불러주던 친구들도 서서히 연락이 뜸해졌다. 학원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던 나는 명절이나 긴 연휴를 빼고는 고향집조차 갈 시간이 없었다. 아니, 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함께 일했던 선생님들은 모두 학교 선배였기에 깎듯이 대해야 했고, 스승의 날, 설날, 추석, 생일 등은 학교 선배인 원장님을 챙겨야 했기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선물을 고민해야 했다. 한 번은 부원장이었던 A선배와 원장님 명절 선물을 사러 함께 마트를 갔었다. 공동 선물을 고르고, 견과류를 좋아하시는 원장님을 위해 작은 견과류 한 통을 사비로 사겠다고 말했더니 A선배는 좋은 생각이라며 내 생각을 거들어줬다. 별생각 없이 한 이 작은 행동이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올 줄 몰랐다. 함께 드릴 선물과 함께 올려 둔 작은 견과류 통을 발견한 B선배는 나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왜 혼자만 잘 보이려고 하냐, 이런 걸 사려면 모두에게 미리 말해줘야 하지 않냐" 등등 그저 혼자 원장님께 잘 보일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애라며, 본인들은 생각이 없어서 준비 안 했겠냐며... 그 뒤로도 나는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도 선배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더 어려웠던 것은 학부모님과의 관계였다. 아이들은 참 다루기 쉽지 않았다. 특히 사춘기의 아이들은 더 심했다. 집에서도 컨트롤을 안 되는 부분을 학원 선생님은 반드시 컨트롤해 내야 했고, 그 와중에 성적도 잘 나와야 했다. 돈을 냈으니 아이와 부모 노력과는 전혀 관계없이 무조건 성적은 올라야 했고, 강사의 자질은 매 시험에서 나오는 성적에 달려있었다. 성적이 안 나왔을 땐 학부모들의 항의, 폭언에 가까운 상담전화를 참고받아내야 했다. 함께 새벽까지 공부하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보강을 했던 모든 과정은 전혀 필요 없었다. 오로지 결과, 성적에 판가름 났다. 나에게 배운 지 몇 개월 안 된 학생이 들어와 첫 번째 시험을 치렀을 때 일이다. 성적은 너무 안 나왔지만 사실 예상했던 바였다. 학생은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않았고, 나는 그걸 틈틈이 챙겨줘야 한다고 학부모님께 알렸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생계를 핑계로 바빴고, 아이는 한참 사춘기로 반항하기 바빴다. 매일 학원을 불러도 집중하지 못했기에 나쁜 성적은 예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의 엄마는 아니었나 보다. 시험이 끝나고 성적상담을 하는데 들려오는 말은 "돈도 냈는데 넌 뭐 했냐고, 니가 그러고도 강사야? 애 성적이 학원 다닐 때도 안 다닐 때도 그대로인데, 그럼 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거 아냐?" 반말과 함께 폭언에 가까운 말들을 뱉어내는 전화는 처음이었기에, 당황해 어버버버하다 그냥 "죄송하다, 다음에 더 신경 쓰겠다"라고 전화를 마무리했다.
10년도 더 넘은 일이지만 그때의 전화가, 나는 여전히 기억난다. 그때의 톤, 억양, 대사들까지 모두. 그만큼 나에게 충격적이었고,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전화를 걸고, 받는데 두려움이 생겼다. 전화공포증, 이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기 전엔 심장이 두근거리고 속이 울렁거리기에 부모님 하고도, 남편 하고도 전화통화는 잘 안 한다. 그땐 더 심했다. 친구와도 부모님과도 그 누구와도 전화는 할 수 없었고, 오는 전화들도 바빴단 이유로 문자로 답장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었던 전화는 학부모님들의 전화였다. 업무 중 하나였기에 나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계속 트라우마를 쌓아갔던 것이다.
그렇게 점점 모든 관계가 힘이 들었다. 왠지 내가 하는 말이 오해를 살 것 같아서 말을 아끼게 되었고, 나의 행동, 표정도 신경 쓰게 되었다. 또, 인정받기 위해선 무조건 결과로만 보여줘야 한다고, 과정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점점 결과에 집착하게 되는 만큼 열심히 노력하는 나도, 그런 시간들도 너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 속에서 나는 더 자신감을 잃었고, 그만큼 자존감도 낮아져 잘하는 거 하나 없는 참 못난 사람이라 느꼈다.
그래서 더, 혼자 있는 게 편했다. 누구와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메뉴선정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밥도 혼자 먹는 게 편했고, 내 취향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영화도 혼자 보는 게 좋았다. 쇼핑도, 나들이도, 장보기도 혼자여야 했다. 나는 분명 혼자가 마음은 편했는데 적막함이 싫어 항상 '무한도전'을 라디오처럼 켜놨고, 답장은 하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나를 찾지 않을까 카카오톡을 끊임없이 들여다봤다. 친구들에게는 항상 바쁘다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날 찾아주길 바랐다. 아니, 아무도 나를 찾지 말라고 카톡을 삭제하면서도 진짜 내가 필요하면, 나를 원하면 문자라도, 전화라도 해주겠지라는 마음이 한 켠에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참 어렸고,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외로웠고, 따뜻한 관계를 갈망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사람이 아닌 따뜻한 존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25년 인생에서 그런 따뜻한 존재는 강아지뿐이었으니까, 내 생각이 자연스럽게 너로 흘러간 걸 지도 모르겠다. 유기견을 키워봤던 입장에서 상처 입은 그들의 마음을 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기에 나는 조금 편한 선택을 하려 '가정분양'을 알아봤다. 여러 카페에 글을 남겼고, 연락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분과 연락이 닿았고, 내가 있던 춘천에서 거리가 있던 서울 5호선 끝까지 '마루'를 데리러 다녀왔다. 사랑받고 싶었던 만큼, 사랑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때, 나는 분명 너와 행복해질 것이라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