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 대한 트라우마가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건 아니었다. 특정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문제였고 굳이 극복하지 않아도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트라우마의 대상인 개에게서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제목: 브런치 스토리 일정: 지금 이 순간 주제: 멍멍 바라보기
일정이 공개되었다. 만물과 연결이 가능하다는 도올고 막토해님의 은하계 행성투어 다음 목적지가 우리[개! 봤다] 행성이라는 것이다. 참가신청 사이트를 열고 신청서를 작성하여 올렸는데 운 좋게도 참석자 명단에 올랐다.
브런치 스토리
삶과 인생이 재료이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른 아침인데 부지런한 사람들이 이리도 많았다니. 게으른 나에겐 놀라운 광경이었다. 강연장에 들어서니 벌써 10,000개의 자리가 꽤 많이 차있었다. 이번 강연엔 특별한 이벤트 하나가 있었다. 몇 해 전 한 개발자에 의해 브런치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음식이 있다. 특이한 점은 같은 맛이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재료 자체가 각자의 삶과 인생이다. 신청서를 쓸 때 사용할 재료들도 같이 첨부했었다. 그리고 내 자리에 브런치가 올려져 있었는데 비주얼이 좀 맛없게 생겼었다. 그래도 이것 또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맛이라는 사실에 나름 만족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여러 행성들을 돌고 온 도올고 막토해님이 입장하였다. 강연이 시작되었고 그는 열변을 토해내며 스토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난 시간 가는지모를 정도로 강연에 푹빠져있었고 어느새 강연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말을 하며 퇴장하였다.
"대상을 그저 바라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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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그중에서 행성 최고 음식을 경험할 수 있던 것이 좋았다. 보이지 않던 내 삶과 인생의 맛을 맛볼 수 있던 게 강연에서 얻은 큰 수확 중 하나였다. 내 브런치 맛은 [쓰다]였다. 오늘도 내일도 [쓰다]이다. 다른 분들의 브런치 맛은 어떤지궁금하였는데 한 입 맛볼 수 있는지 양해를 구하기도 전에 그들은 자신들의 브런치를 선뜻 내주었다. 그로 인해 주위사람들의 브런치도 살짝 맛보았는데 놀라웠다. 무엇하나 훌륭하지 않은 맛이 없었다. 같은 맛이 없다는 것을 설마 하며 의심했었는데 이번 경험을 통해 믿게 되었다. 진짜 없었다. 한 분, 한 분의 브런치는 행성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맛이었다.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이 맛들을 본 후 나도 나만의 맛을 낼 수 있는 재료를 열심히 만들고 구해나가야 함을 느꼈다. 그들이 있어 맛있는 브런치를 맛볼 수 있어 좋았다. 이 순간만큼 내 세상에 그들이 연결되어 있어 좋았다.
꼰 다리를 풀다.
그해 가을 어느 날 해피족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 Car승강장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멍 때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Car가 오는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아뿔싸! 시야에 큰 개가 나타났다. 멍 때리다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미 늦었다. 개가 적정거리 안에 들어왔지만 회피해 피신할 곳도, 맞서 싸울 무기도 없었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이제는 피신할공중전화부스도 거의 없고,한 때 최고의 무기인 동전도없을 때가 많다. 동전을 안 들고 다닌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동전의 필요함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하찮게 여기던 것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수중에 무기라고는 핸드폰뿐이다. 그런데 이 무기를 던질 수 있을까. 아니 못 던질 것이 뻔하다. 이제 핸드폰이 내 안위보다 소중해졌는지 모른다. 난 또 ♬엄마가 보고 싶어 달릴 거야. 하늘 끝까지. 달려라. 달려라.♬ 이 노래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이 정도 거리에서 달아나려면 스타트가 빨라야 하는데 난 운동신경이 별로인 몸치다. 그런 순발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말입니다.움직이기가 귀찮다. 귀찮다는 어휘가 이 순간에 떠오른 이유. 난 그것이 알고 싶다. 두려움이란 감정도 거의 없다. '뭐지?'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니 생각이란 걸 하게 된다. 강연 마지막 말을 생각하며 그 개를 그저 바라보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꼰 다리를 풀어 개의 길을 터주었다. 개의 뒤태를 바라보며 헤헤거렸다. 비록 나비족처럼 꼬리(?)가 있는 게 아니라 직접 연결은 못 한다. 만지지는 못 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개는 트라우마 극복과 연결되는 첫 개였다. 꼬았던 다리를 푸는 순간 마음에 무언가 꼬여있던 실타래 한 올이 풀린 듯한 느낌이었다.
Choice
신기한 경험이었다. 회피만 해왔던 내가 그때 헤헤거리며 미소를 지었었다. 이제 난 헤헤거릴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다. 비록 만지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헤피만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해피족이 되고 싶었던 난 헤피족이 되고 있었다. 회피족, 해피족, 헤피족은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는 한 끗 차이였다.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이 한 끗 차이의 결과는 참으로 엄청났다.선택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꿀벌의 가르침
"넌 이제 선택할 수 있어.
① 멍하니 바라볼까.
그 해 여름 어느 날 퇴근차량의 맨 뒷좌석에 앉아 여느 때처럼 음악을 듣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열린 창문사이로 들어왔고 꿀벌도 따라 들어왔다. 날아다니는 꿀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꿀벌의 비행을 따라 내 눈도 비행했다. 꿀벌은 잠시 간이역에 들린 듯 내 몸에 내렸다. 이번엔 직접연결인가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어보았다. 꿀벌은 내 셔츠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아. 쏘여도 이게 내 세상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나온 꿀벌은 비행경로에 문제가 생겼는지 내 몸에 이륙했다가 착륙했다가를 몇 차례 반복했다. 난 슬금슬금 창문 쪽으로이동을 했고 꿀벌이 창문을 나갈 수 있게 활주로를 짧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꿀벌은 버스 밖으로의 비행을 시작했다.
② 멍하니 바라보지 말까.
난 재빨리 꿀벌이 나간 창문을 닫아버렸다. 반대쪽 창문도 닫아버렸다. 그리고 등을 쓸어내리며 셔츠를 마구마구 털어낸 후 그 뜨거운 여름에 목까지 단추를 메우는 패션코디를 했다. 직접 연결은 아직 무리다. 접촉은 아직 무리다. 웬만하면 하지 말자. 꿀벌이 아니고 말벌이었다면 과연 멍하니 바라볼 수 있었을까. 가끔 사나운 개도 존재하고 사나운 사람도 존재한다. 이 대상들을 멍하니 바라보지 말아야 할 때도 있겠지. 물릴지 모른다. 특히 미친 개나 사람한테 물리면 약도 없다더라.
Circle
○! 받다.
저마다 브런치의 맛이 다르듯 저마다 세상이라는 원의 크기도 다를 것이다. 내 원의 크기는 때론 너무 작아 점에 가깝다고 느껴 어둡기만 했을 때도 있었고 때론 너무 크게만 보려 해 끝이 없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의 원 안에 있던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았던 건 아닌가 싶다. 이젠 그저 그것들을,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려 한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원 중심에 있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니 세상이라는 원을 받았다.
아! 받다. 매일 받다.
궁금한 것들이 많아졌다. 메일 초고를 작성하고 퇴고의 퇴고를 마친 후 막토해님께 메일을 전송했다. 읽음 표시가 되어있는데 며칠이 지나도 답변 메일이 오지 않았다. 전송오류인가? 메일 원고가 별로인가? 다시 살펴보았지만 내 눈엔 잘못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오매불망 기다린 지 수일이 지나고 있었다. 무시받는 느낌에 짜증이 살짝 일어나기 시작했고 난 매일 메일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연락이 왔다. 왜 답변을 안 해주셨냐며 이유를 따지듯 물어보자 그는 말했다. "매일 못 받으셨나요? 매일 받으셨을 텐데. 잘 찾아보세요."라는 말을 하였다. 다시 메일함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없다. 눈에 보이던 것만 믿던 난 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참을 멍 때리고 있을 때 난 알 수 있었다. 그렇다. 난 매일 받았다. 아! 받았었다. 아!름다운 세상 속 함께하는 세상을 매일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