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맛을 알아?

by 앵두나무


오늘은 일 년 중 절기상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 이제 슬슬 초여름의 문턱에 다가서는 느낌이다. 아직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시원하지만 낮으로는 정수리가 뜨거울 정도로 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날씨가 점점 더 더워지면 아무래도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여름 과일들이 가장 먼저 나의 구미를 당긴다.


과일가게에 들어가 오늘은 어떤 과일을 사볼까 싶어 이리저리 살핀다. 여러 날동안 비가 오지 않아 수박이 제일 맛있다는 사장님의 추천에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것을 고르고 손가락을 구부려 톡톡 두드려 본다. 통통통 제일 맑은 소리가 나는 놈으로 골라 계산을 하는데 나의 눈에 띄는 과일이 있다. 짙은 보라색의 포도.. 사장님께 포도 맛은 어떠냐고 여쭤봤더니 지금도 괜찮지만 좀 더 있으면 더 맛이 좋을 거라 얘기하신다. 그렇지... 포도는 7월이 지나야 맛있지 싶었다. 짙은 보라색의 포도를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


아빠는 모든 과일을 좋아하셨는데 그중에서도 사과와 포도를 특히 더 좋아하셨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사과는 먹으려고만 하면 사계절 내내 살 수 있지만 포도는 아무래도 여름 과일이다. 아빠는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나는 계절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살아생전 아빠는 퇴근길에 자주 과일이 든 깜장 비닐을 흔들며 들어오시곤 하셨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여름 끝물에 많이 나오는 거봉을 먹어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경험을 했었다.

"어머 이거 뭐지? 그냥 포도가 아닌데? 엄청 달고 맛있는데?"

"그거 거봉이다. 달재?"

엄마랑 내가 얘기하는 도중 아빠가 끼어드신다.

"거봉이 아무리 달아도 포도는 포도 비슷한 거 말고 오리지날(?) 포도가 최고지. 다른 건 오리지날 포도만큼 깊은 맛이 안 난다."

아빠는 그때도 어김없이 오리지날 포도를 드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포도에 깊은 맛이 있다는 걸.. 그리고 그 깊은 맛은 본질에 충실한 오리지날 포도를 다른 포도류들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년 전부터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샤인머스켓이라는 포도류가 엄청 인기가 많은데 값도 꽤 비싸다. 달달하면서도 청포도처럼 껍질까지 먹으며 아삭한 맛이 일품이다. 그 샤인머스켓을 사 먹으면서도 아빠 생각이 났었다. 울 아빠가 살아계셨으면 과연 이걸 드시고는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세상 좋아졌다고 하셨을까?? 아마도 아빠는 어김없이 포도 비슷한 맛 내는 거 말고 오리지날 포도를 예찬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 해.. 그리고 그다음 해에도 포도를 보면 가슴이 저릿해져 왔다.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시던 과일이었는데 이제는 같이 먹을 수도 없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 올해로 아빠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포도를 보면 맘이 저릿해지기보다 포도를 사서 집으로 와 딸아이와 함께 먹으며 이야기한다.

"윤아.. 포도 달고 맛있지? 외할아버지가 포도를 제일 좋아하셨어.."라고 얘기한다.

텔레비전이나 어느 곳에서든 아빠가 즐겨 부르시던 '빨간 구두 아가씨' 노래가 흘러나오면 아.. 저 노래는 울 아빠가 가수 뺨치게 잘 불렀었는데...라고 추억한다.

11월의 대학 수능 날의 풍경을 뉴스에서 보게 되면 아빠 생각이 난다. 내가 수능을 치러 가던 날 학교 앞까지 아빠가 데려다주셨는데 차에서 내리는 내 뒷모습을 보고 파이팅을 외치던 아빠... 텔레비전 속의 아빠. 엄마들도 울 아빠처럼 그런 마음이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부재로 마음이 힘들었던 나는 이제 아빠가 생각나면 그저 슬퍼하기보다 아빠를 맘껏 그리워한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몇 년 동안은 여름 과일들이 나의 눈물버튼이었지만 이제는 포도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기보다는 나만의 방식으로 아빠를 그리워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물론 어느 때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어쩜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그저 달달한 맛만 있는 줄 알았던 포도에 깊은 맛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것. 같은 계절은 늘 돌아오지만 해마다 느끼는 계절의 단상이 달라진다는 걸 알아가는 것. 같은 사물을 보고 같은 상황이 와도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매번 같을 수는 없다는 걸 알아가는 것. 그런 걸 하나 둘 알아채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올해 여름에도 나는 오리지날 포도를 사서 먹으며 아빠를 그리워하겠지....

그래.. 포도는 역시 오리지날 포도가 최고 지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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