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콩깍지 팥깍지
콩밥도 좋아하고 팥밥도 좋아하는 내가 (팥죽도 맛있다. 콩죽은 못 먹어봤고)
어젠 점심으로 콩 송편 한 줌과 팥 시루떡을 시장에 둘러서 사 왔다. 볕에 익은 걸 콩꼬투리도 까주고 팥껍데기도 벗겨서 적정온도의 열을 가하면 맛은 둘 다 좋아!
한 줌의 콩떡 다 먹고 팥떡 반을 더 먹으면서 글을 쓴다. 지나치며 눈과 부딪히면 반짝 글감이 되는 콩깍지 팥깍지의 진실 이야기라 나는 세 번씩 읽어주며 뒤죽박죽 섞였어도 혼자서라도 흥미를 갖는다. 사실화이기 때문인가 내 이야기여서 일까?아무래면 어때 자신을 갖고 자꾸만 써야지. 콩깍지에서는 콩이 나오고 팥깍지에서는 팥이 나오는데 한참을 까다 보면 콩바구니에 팥을 던져 넣을 때도 있게 된다.
깍지 까다가 정신 줄 놓고 뭣에 씌어서...
마음을 벗겨내서 글로 지어 콩맛도 팥맛도 어우러지게 해보자. 나 또한 삶이 이러지 않았던가. 검정색도 밤색도 자줏빛도 색바램이 있지 않았던가.
오늘은 내가 돈을 벌던 직업을 써봐야겠다.
엄마네 문구점이 바쁘니 학교 행정실 과장이 도매상과 가격을 알아보러 계속 둘렀다. 자기 부인이 교내에 차릴 거라며 성가시게 쫓아다녔다. 그리고선 학교의 양쪽 문을 다 잠가놨다.
악보 복사는 예약해야 하고 종일 서서 복사하고 보통 다음날 찾아가기 일쑤인데 부인이 감당 될 수 있을까? 배가 아프다는 넘의 사정이고.
담벼락에서 아우성치는 학생들한테 구입한 것을 넘겨주다가 곧 가게 문을 닫아야 될 듯싶을 때 아랫길 ‘치키펍’ 치킨가게에서 손이 딸리고 밤 장사라 피곤하다며 나보고 광고지를 붙여달라고 했다. ‘내가 식당도 다녔는데 이걸 못하리’ 아르바이트가 시작됐다.
스커트랑 구두는 청바지랑 운동화로 바뀌고 기능성 옷을 처음으로 입어보게 됐다.
다행인 것은 우리 두 딸내미가 도서관에도 혼자 갈 수 있고 공부도 스스로 할 나이가 됐기에 작은아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전단 배포 작업한 것이 이 아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십 년이 넘게 다리품을 팔았다. 거래처가 꽤 있었기에.
처음엔 치킨집 것만 운동 삼아 했더니 계절 쫓아온 감기도 안 걸리고 추위도 덜 타고 건강해졌다.
엘베에서 마주친 식당 업소 사장님과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님 눈에도 띄어서 난 한 손에 각각 업소의 너 덧장씩을 손가락 사이에 낑겨서 돌렸다. 돈도 수월하게 모였다. 그래서 집을 사고 가구도 다 바꾸고 대출금도 갚았지. 그런데 남편이 요걸 감지하고서 (이런 고약한) 페이가 쎈 그 좋은 기술직을 자주 이동해서 빌딩을 못 보게 했다. (저축이 좀 됐을 건데)
어느 날은 정면에 있는 유리문이 계단인 것을 현관문으로 착각해 무거운 가방 메고서 계단을 굴렀었다. 다행히도 레드 카펫은 깔려 있었고 술내가 풀풀 나는 웨이터 젊은이가 유리문 밀고 굴러들어선 나를 부추겨 일으켜 준 적도 있다.
성룡이 지붕 너머 하늘길 넘듯이 나도 두세 개의 계단을 공중으로 날면서 까치발로 중간중간 겅중겅중 하다가 구르게 된 게 중국 무술영화를 내가 찍은 맛인데 반바지를 입어줘서 다리에 멍은 들었다. 이렇게 액션 영화 한 편을 찍고는 오전 오후, 어떤 날은 밤에도 광고 일이 밀려서 밖을 나다녀야 했다. 돈도 돈이지만 나는 일복이 터져서 동네 사람을 돈 주고 시키기도 했다. 하다 보니 우리 동네에서만도 여러 명의 전단지 알바 엄마들이 생겨나와 서로들 아는 체를 하며 일거리 나눔을 했다. 같은 구역끼리 광고지를 분배해서 약게 돈이 모아지기도 했고 같이들 밥도 먹었다.
남의 종이를 서로 떼다가 싸움도 일고 남의 집 현관이나 대문 앞에는 더덕더덕 전단이 도배될 정도로 우리는 돈을 벌었으며 돈의 씀씀이를 밝히기도 했다.
서글서글 한 나는 원장님들과 친근하게 지내며 모밀국수도 같이 먹고 본인이 손수 책을 집필한 시집도 받았으며 (미술학원 한숙희 원장님 시집을 같이 온 엄마한테 건넸다. 아까운 양보) 보톡스도 같이 맞으러 가자고도 했다.(보톡스는 맞지 못함. 아직도) 첫사랑과 집안 얘기도 풀고.
와중에 보드람치킨 문사장님 하고는 아직까지도 명절 인사를 같이 나눈다.
하루는 대출 알림 명함을 저녁때 차에 꼽는 게 들어와서 아는 엄마들 일곱 명이 계산동에 위치한 대출 사무실에 다들 앉아서 명함 받기를 기다렸다.
이곳 직원들은 다 들었다.
우린 서로 친정엄마한테 이십만 원씩 용돈을 드린다고. 한 마디씩 다했다.
번짓수대로 이어서 동네를 돌다 보면 아이들 학교 근방도 가게 된다.
작은 아이도 큰 아이도 여고 때 마주치니 교복을 입은 채로 책가방에 담아 가 내 일을 도와줬다.
학교 바로 앞인데 안 챙피 하단다.
조카 셋도 그 집 앞을 지날 때 시켜봤다.
큰 조카는 1층만, 작은 조카는 4층까지만.
땅개였던 막내 조카만 찡그리지 않고 전단을 더 달라고 했다. 시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인성이 보였다.
이렇게 십 년이 넘으니 아날로그 시대는 갔다. 핸드폰이 성행하고 인터넷이 뉘집이나 다 사용되니 이 직업도 흐려져서 지금은 마트 전단이나 우편함에서 간간이 보게 된다. 배달 앱이 장악해서 나도 이일을 접었다.
이때쯤 난 몸무게가 비지땀 나간 것으로 많이 줄었다. 원래 날씬이가 더 말라버렸다.
식당에서 사먹는 돼지갈비 값도 모를 정도로 내겐 시간의 개념도 잊고 청춘이 그렇게 가버렸다.
알던 이가 길에서 말했다. “남편은 돈 버는 아내 한약 좀 먹여가며 돈 벌어오라고 시켜야지.”
콩이랑 팥이 심어진 화분에서 콩깍지가 벌써 꼬투리를 벗겨달라고 초록빛과 대치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