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필사는 내 안의 따뜻함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점점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다. 내 삶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사라진다.
길을 가다 무거운 짐을 든 노인을 봐도, 누워있는 사람을 봐도, 내가 바쁘다보니 ‘누군가 돕겠지’ 하고 지나치는 일이 많아졌다. 심지어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이웃의 얼굴조차 모르고 사는 게 당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걸까?
어제, 내가 속한 봉사단체에서 진행하는 작은 바자회에 다녀왔다. 쓰지 않는 물건을 기부하고, 필요한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에 가져가며, 그 수익금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행사였다.
한때 누군가에게는 필요했던 물건들이 또 다른 주인을 만나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진짜 감동적이었던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봉사자들, 기꺼이 물건을 기부한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사가며 기쁨을 나누는 사람들.
서로 하하호호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행사장에는 "나눔이란 게 결국 자기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작은 도움을 실천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 속 한 구절을 떠올렸다.
"우리가 남에게 베푸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다.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 안의 따뜻함도 커진다."
맞다. 나눔은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단순히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과정이며,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선택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힘드니 남도 힘들겠지’라는 생각에,
또는 ‘굳이 내가?’라는 생각에,
점점 무심해지고 있다.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이익이 먼저이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조차 의심부터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전략처럼 되어버린 현실들......
그런데 오늘 바자회에서 본 사람들은 달랐다.
자원봉사로 시간을 내준 사람들이 있었고, 집에서 더는 쓰지 않는 물건을 기꺼이 내어놓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굳이 내가?’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한 봉사자가 행사 끝무렵, 행사장을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 생각보다 더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는 모습을 보는것만으로도 따뜻해져오는거 있죠~"
그 말을 듣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나눌 때 더 풍요로워진다. 이기적인 사회라고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남을 돕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작은 희망처럼 느껴졌다.
내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해지길 바란다면,
누군가 나서기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어야 한다.
결국, 나눔이란 건 환경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걸 보았다.
우리가 조금 더 서로를 신경 쓰고, 조금 더 나누는 삶을 산다면, 세상은 조금씩 다시 따뜻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