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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Nov 02. 2024

한 번도 슬퍼해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위로를 건네다

슬픔을 추월해 볼까

브레이크를 놓은 채 달려간다

늦은 대가를 지불하고서 깨닫는다

슬픔은 추월할 수 없음을

제 속도대로 흘러가야 하는

슬픔의 속성은 잔혹하다


사물사이 적당한 간격

사람사이 적절한 간격

거리조절에 실패하고선

또다시 사고처럼

슬픔에 부닥친다


너무 가까워서

때로는 멀어서

알아보지 못한 걸까

무심코 놓아버린 걸까


책상 위에 

활자를 흘리다가

과거도

순간도 잊고

도망치듯 뛰쳐나온다


종이 위에

기억흘리다가

그리움도 놓고

자신도 잊고

흘린 기억 닦을 새 없이

사람들 모였다 사라진다


어떤 삶을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타인이  

간 속을 걸어간다

다시 삶 속이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

세상은 망각한 채

태연하게 굴러간다


내 슬픔은 아직 2월인데 

계절 11월로 멀어진

흘리고 잃어버린 기억 속 

슬픔만 용케 살아남았다




오늘의 슬픔 사용설명서
우리는 기대했던 것보다 기쁨은 훨씬 더 기쁘게 고통은 훨씬 더 고통스럽게 느낀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바닥짐을 실어야 하듯, 우리에게는 늘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이나 결핍이 필요하다.
<앤드루 솔로몬 '한낮의 우울'>

지난주 '빨치산의 딸',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 강연회에 다녀왔다. 차분하고 온화한 눈빛,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작가님이 보였다. 소문난(?) 애주가라는 작가님은 책 속 문체와 말투가 한결같았다. 글은 말하듯이 써야 한다던 강원국 작가님 말씀이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말하듯이 쓰라.' 간단해 보이는 원리지만 말 주변, 글 주변이 부족한 나로선 결코 쉽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 속엔 평탄하지 않았던 삶의 순간,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작품 속에 녹아있었다. 작가님은 가슴속 응어리를 다 풀어내지 못했다며 언젠가는 글로 풀어내겠다며 당찬 포부를 밝히셨다.


 작품 중 뜨거운 감자는 당연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작가님은 작품에피소드를 풀어놓다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셨다. 문득 '아버지의 해방일지' 장례식 장면에서 또 다른 장례식장 장면이 겹쳐졌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고 변화에 적응하듯 슬픔에 적응해 가던 날들이.

그날, 이별과 죽음 앞에 위로를 건네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밥을 먹듯 숨을 쉬듯 정해진 말을 읊고 자리를 떠났다. 슬픔의 무게는 그대로인데 마음의 무게만 덜고 떠나는 사람들. 한 번도 슬퍼해본 적 없는 얼굴로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잠시 머물다 떠나간 그들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어느새 강연이 끝나고, 우리는 썰물처럼 흘러가 삶 속으로 빠져들었다.




슬픔공부 요약
고통받는 능력을 포기하느니 기꺼이 커다란 대가를 치를 용의가 있다. 차라리 평생 막연한 슬픔 속에서 살 것이다. (...)
사람은 격심한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살아남을 수 있다.
<앤드루 솔로몬 '한낮의 우울'>

뚜벅뚜벅.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는 발자국소리. 나만 정체되어 있는 게 아닐까. 성과를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이 바위처럼 가슴을 눌렀다. 그때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따뜻한 눈빛이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지지 않는 사랑으로 감싸는 사람. 그 마음을 붙들고 올라갔다. 닿기 위해 쓰고 걸어간다. 어둠이 걷히면 새벽에 이른다. 곧 해가 뜨고 희망찬 아침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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