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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욱 Jul 12. 2024

조선 천재의 ‘현판 글씨 소동’

[순례노트⑤] 해남 대흥사와 추사 김정희

한반도 땅 끝 해남에 자리한 대흥사.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걷다보면 이름조차 멋스러운 누각, 침계루(枕溪樓)가 눈에 들어온다.      


우거진 수풀과 맑은 계곡물이 빚어내는 조화도 절묘하지만,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베고 누워 단잠이 든 듯한’ 편액의 글씨를 바라보면 순례자의 마음도 절로 편안해진다.

해남 대흥사 침계루 편액

조선 후기 명필 이광사(1705~1777)의 글씨다.    


명나라의 멸망과 병자호란 이후 청에 대한 적개심으로 '조선이 곧 중화(中華)'라는 조선 중화의식이 생겨났고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에 대한 자존감이 ‘동국진체’로 나타났다.


원교 이광사는 '동국진체'를 완성하고 이론서 「서결」을 지어 서법의 체계를 구축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서결」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침계루 누각 아래를 통과하면 이번엔 ‘대웅보전’이라는 선명한 글씨의 현판이 시선을 끈다. ‘침계루’와는 글씨체가 완전히 다르구나 생각했는데, ‘대웅보전’ 편액도 이광사의 글씨란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외경

원교는 조선 후기 당쟁에 휘말려 진도와 완도 등에서 20여년 유배생활을 했다. 이 지역 지식인과 스님들은 원교 글씨를 원했고, 대흥사뿐 아니라 강진 백련사, 구례 천은사, 고창 선운사 등에 많은 편액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금석학파를 만들고 실사구시를 추구했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내린 이광사 글씨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다.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

1840년 54세 나이로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 추사는 ‘평생의 벗’ 초의선사(1786~1866)가 있는 대흥사에 들러 말하기를…     


「“저 대웅전 현판 글씨 틀렸소이다. 부처님께서 계시는 이 법당에 저렇게 속기 범람한 글씨가 걸려 있어서 되겠소이까? 당장 떼어버리시오. 이광사의 글씨에는 중생을 진실로 사랑하는 부처님의 마음과 부처님을 우러르는 중생의 마음이 들어있지 않습니다.”」<한승원, 『추사1』, 열림원,2023,p.336>


그러면서 자신이 대신 써 주겠다고 나섰고 잠시 고민한다.      


「‘무량수각 네 글자를 머리에 그렸다. 영원한 시간(無量壽)이 담겨있는 극락전에 걸어야 할 현판이므로 영원을 품고 있도록 써야 한다. 무(無)자 대신에 무(无)자를 써야 한다. 무(無)자가 섶을 쌓아놓고 불 질러 소멸시키는 뜻의 없음이라면, 무(无)자는 이 세상을 있게 한 시원으로서의 없음을 뜻한다. 그것은 하늘 천(天)자를 변형시킨 글자로 텅 빔(空)을 내포한다. 극락의 영원한 시간은 하늘의 시간이다. 우리의 삶은 그 시원(거대한 구멍인 태허)에서 왔다가 다시 시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 시원 속에 영원은 존재한다.’」    <한승원, 『추사1』, 열림원,2023,p.337>


그리고 써 내려간 글씨가 바로 ‘무량수각’ 편액이다.   

추사가 쓴 무량수각 편액. 대흥사 백설당에 걸려있다.

제주도 유배생활 때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라는 걸작을 만든 추사.     


1848년 유배에서 풀려 한양 가는 길에 대흥사 초의선사를 만나서는 「“지난번에 떼어내 버리라고 한 이광사의 현판”」을 찾았다. 자신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추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 절의 경내에 추사가 쓴 무량수각 현판하고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이 나란히 있어야 후세 사람들이 즐겁게 비교해가며 품평할 것 아니겠소? 세속적으로 곱게 화장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풍기는 향기와 소박 고졸한 여인의 음전한 맨 얼굴이 풍기는 향기로 말미암아 대흥사는 흥미로운 절이 될 것입니다. 이광사 글씨는 다시 찾아내 걸도록 하시오.”」<한승원, 『추사2』, 열림원,2023,p.161-162>     ///TOK///  


**주)
 이 글 중에서 꺾쇠「 」 속 인용문장은 소설가 한승원 선생의 장편소설 「추사1,2」 (열림원,2023)에서 가져왔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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