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⑦] 강진 백련사와 다산 정약용
‘르 카멜리아’
럭셔리 패션의 대명사 샤넬의 상징. 고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꽃이라고 샤넬은 자랑한다.
동백꽃이다. ‘명품의 상징’ 동백꽃은 원산지가 바로 한국과 중국, 일본이다.
강진 백련사 일주문에 들어서면 빼곡히 자리잡은 동백들이 순례자를 반긴다. 천연기념물 151호다.
약 7000그루의 동백은 11월 말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 2,3월에 절정을 이룬다. 꽃잎이 하나 둘 지는 여느 꽃과 달리 꽃송이째 낙화하기에 ‘나무에서도 피고, 땅에서도 피는’ 꽃이다.
한파를 견뎌 피어나고 꽃송이째 지는 장엄함은 원칙과 신념을 지키는 선비의 높은 지조를 닮았다.
동백나무를 사이에 두고 백련사 가는 길을 걷다보면 조선 후기 유불선을 넘나들던 사상가의 향기도 느낄 수 있다.
강진으로 유배 온 ‘조선의 천재’ 다산 정약용(1762~1836)과 불교의 해탈 문제를 넘어 경전 '주역'에도 정통했던 혜장선사(1772~1811)가 주인공이다.
다산과 혜장은 ‘주역’ 해석을 놓고 한바탕 토론을 벌이다가도, 다향을 앞에 두고 선 인간적 고뇌를 서로 털어놓았다.
백련사와 다산초당 사이에 난 오솔길이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두 사상가를 잇는 소중한 통로였다.
「소통을 생각했다. 다산 서옥에서 만덕사(지금의 백련사)로 올라가는 자드락길 같이 뚫려있는 소통. 그 소로를 타고 혜장은 정약용을 만나러 오고, 정약용은 혜장을 만나러 가곤 했다. 그 길은 유학으로 풀리지 않은 것은 불교로 풀고, 불교로 풀리지 않은 것은 유학으로 푸는 소통의 자드락길이었다.」
<한승원, 『다산2』, RHK, 2018, p.220>
혜장과 다산의 애틋한 우정은 주고받은 서찰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연찮은 해우에 갖은 시름 다 잊다가
헤어지면 마음 아파 그저 생각뿐인데,
때마침 들녘 절간 찾아
껄껄대는 웃음 속에 불법을 묻는다.“ <혜장과 다산이 주고받은 편지 중>(출처:백련사 홈페이지)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놓았다네” <다산과 혜장이 주고받은 편지 중>(출처:백련사 홈페이지)
18년 유배 생활의 한을 혜장이라는 벗과의 지적 소통으로 달랜 다산이지만, 가족과 떨어져 있는 고통을 견디기는 쉽지 않았을 터,
당시 권력자들에게 ‘잘못했다’는 편지 한 통을 보내면 유배가 풀릴 수 있다는 아들의 전갈에 다산은 선비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들아.
천하엔 두 개의 기준이 있는데, 진리냐 아니냐, 이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 하는 기준이다.
두 기준에서 다시 네 가지 등급이 나온다.
첫째, 진리를 지키면서 이익을 얻는 것.
둘째, 다음은 진리를 지키면서 해를 입는 경우
셋째, 그 다음 등급은 진리 아닌 걸 추종하면서 이익을 얻는 경우
넷째,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등급은 진리 아닌 걸 추종하면서 해를 입는 것.
잘못했다고 항복하라는 건 세 번째 등급인 진리 아닌 것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으라는 것이다.
그건 결국 마지막 등급, 진리 아닌 것을 추종해 해를 입는 것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이 또한 내 운명인 것이다.
마음을 크게 먹고 걱정하지 말고 시일을 기다려 보는 게 도리에 십분 가까울 것이다.」
<한승원, 『다산2』,RHK, 2018, p.256-258>
유배생활의 막막함 속에 백련사 앞 바다를 바라보며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당에서 대웅전과 보랏빛 만덕산을 등진 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섬들이 연꽃잎처럼 안존했다. 저 바다를 연꽃바다라고 이름 붙여도 좋고 이 절을 백련사(白蓮寺)라고 불러도 좋겠다.」 <한승원, 『다산2』,RHK, 2018, p.139> ///TOK///
*주)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장편소설 「초의」 (열림원,2023)에서 ‘정약용의 삶의 역정은 보석 같은 사리를 앙금지게 하는 한 길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주)
소설가 한승원 선생의 ‘조선 천재 3부작’ 「추사」,「초의」,「다산」 덕분에 강진 해남 순롓길이 뜻깊고 풍성했다는 점 밝혀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