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단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하략)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1983년 같은 제목의 시집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했고, 위의 인용 역시 1983년 초판본에서 했다. 판권을 보니 당시 시집 가격은 1,500원.
사실 난 얼마 전에 갖고 있던 책들을 대거 정리했다. 5월 경 이사를 앞두고 있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버리는 중이다. 책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도 책을 '버린다'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과 이별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내 가장 오래된 친구들. 1,2년에 한번씩 책을 추리고 정리할 때마다 아프다. 그렇다고 이미 내 마음이, 내 손길이 떠난 것들을 마냥 끌어안고 있을 수만은 없다. 보내주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에 브런치에 쓴 글을 링크하니 관심있는 독자들은 읽어보시길.)
어젯밤 갑자기 곽재구의 〈사평역에서〉가 생각나 책장에서 시집을 찾으면서도 난 분명 이 책 또한 이미 내가 떠나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장 하단에 뙇! 이 시집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그 가혹한 숙청 속에서도 살아남았구나. 널 아끼는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컸구나. 어릴적 친구를 만난 것마냥, 난 누렇게 바랜 시집을 한참이나 쓰다듬었었다. 그러자 갑자기 타임슬립이라도 한 듯 확 달려드는 과거의 한때.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이 구절을 읽자마자 난 겨울밤, 눈 내리는 시골의 간이역 풍경 속으로 순간이동한다. 때는 1980년대. 대합실 중앙을 차지한 큰 톱밥난로 앞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들은 모두 막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가난과 피곤에 지친 사람들. 퍼붓는 눈 때문에 기차가 연착이라도 된 걸까. 성에낀 유리창엔 흰 보라수수꽃이 가득한데, 그들은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그저 타다타닥 난로의 불빛만 바라볼 뿐이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불멍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정말 불꽃 앞에 있으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생각은 물론 말조차 필요없다. 그냥 불꽃의 색깔과 모양, 타는 냄새에 집중할 뿐이다. 오래된 시간 냄새 같은 나무 탄내와 시시각각 달라지는 불꽃의 너울과 색깔에 정신을 쏟다보면 영혼이 정화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불멍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삶에 지쳐 귀향 혹은 이향하는 이들. 오늘은 어찌 살아냈으나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길 위의 인생들이다. 때론 침묵하고 때론 졸고, 그러다 쿨럭이며 말없이 자신의 이력을 되새김질하는 이들. 그들에게도 그리운 순간들은 있으리라.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 속에 콕 박혀 스스로 인화되는 풍경들.
이 시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가, 소설가 임철우는 이 시를 모티프로 소설 〈사평역〉(1983)을 썼다. 시 속에서 '모두들'이라고 불렸던 익명의 존재들은 소설 〈사평역〉에 와 저마다 개별 서사를 얻게 된다. 역장, 대학생, 사내, 농부, 서울여자, 춘심이, 미친여자까지 저마다 직업과 이름을 가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막차를 기다리는 '모두들'이었다.
노인을 안고 있는 농부도, 대학생도, 쭈그려 앉은 아낙네들도, 서울 여자도, 머플러를 쓴 춘심이도 저마다의 손바닥들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망연한 시선을 난로 위에 모은 채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만치 홀로 떨어져 앉아 있는 미친 여자도 지금은 석고상으로 고요히 정지해 있다. 이따금 노인의 기침 소리가 났고, 난로 속에서 톱밥이 톡톡 튀어올랐다.
“흐유, 산다는 게 대체 뭣이간디…….”
불현듯 누군가 나직이 내뱉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말꼬리를 붙잡고 저마다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산다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 임철우의 〈사평역〉에서
시와 소설은 마치 한 작가가 쓴 듯 동일한 정서와 스토리를 담고 있다. 소설 역시 시처럼 아름다웠다. 참 이상한 일이다. 삶이 이렇게 누추한데 시가 이토록 아름답다니, 소설이 이렇게 따듯하다니! 이후 이 시와 소설은 연극으로도 각색, 변주되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들이 기다리는 '막차'는 과연 무엇일까. 좀처럼 오지 않는 '그것'. 그러나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는 '그것'. 오늘밤에, 이번 생에 오긴 오는 것일까. '막차'는 도대체 무엇일까. 불확실한 희망인가, 불가해한 삶의 진리인가.
오늘처럼 이렇게 함박눈이 '푹푹' 나리는 날, 난 나무향 가득한 난로가, 아궁이가 미치도록 그립다. 그 앞에 앉으면 온 몸과 마음이, 영혼까지 따듯해질 것만 같다. 그 앞에 앉아 멍하니,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다가, 까무룩... 곤한 잠에 빠져들 것 같다. 꿈속에서 난 설국행 완행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내달릴 것 같다. 성에낀 유리창엔 흰 보라 수수꽃, 삐비꽃을 잔뜩 달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