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이성적이지도 현대적이지도 않은 우리들...
더 이상 쓰지 않으려고 했다. 글을 쓰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나를 드러내는 것, 아니 더 나아가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그래서 요일을 정할 수 없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쓸 수 없었다. 글 쓰는 사람들은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글을 쓰며 스스로 힐링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만나고 발견함으로 괴로웠다. 아니 아팠다.
요즘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글을 읽고 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이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스스로 대단히 현대적이라고 생각하고, 놀라운 수준에 이른 과학 기술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라투르는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은 객관적이지도 않고 독립적이지도 않으며 독보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과학은 동시대의 역사적이며 사회적 이슈들과 매우 깊은 연관성을 맺음으로, 특별한 연결 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나를 어렵게 만든다. 고심하고 망설이게 한다.
지난 글에서 처럼 신랑에게 이혼하자고 했고 날을 잡아 서류를 쓰고 합의 하에 끝내자고. 그리고 서류 역시 둘이 같이 가서 제출해야 하니 언제 가능하냐고. 문제는 분양받은 아파트였다. 실 거주 기간 2년을 채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파트 매매 시 세금을 3억 가까이 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혼이 그렇게 급해?"라고 말한다. 이혼하자는 말은 그가 수도 없이 한 말이었는데, 정작 이혼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옳은 것인가.
이혼이 그렇게 급하냐 라는 말은 마음의 어떤 상태를 드러내는 말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곧장 이야기하지 않고 돌려서 말하는 것일까. 난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을까. 이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답해 주었다. 내가 이혼이 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먼저 뭐라고 물었냐, 계속 입을 다물고 살 거면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냐 말을 열심히 해라 고 말이다. 말을 하려고 한다. 그 말이 진정성이 있든 없든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딸아이의 말처럼 아빠는 왜 엄마 앞에서만 그렇게 애같이 행동해?라고 물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고 그 역시 나에게 그런 것을 요구했다. 가족의 구도에서 아내와 남편의 위치는 엄마와 아들의 입장이 아니다. 그런데 늘 아내에게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관계는 끊임없이 뒤틀리고 왜곡된다. 어떤 잘못을 해도 엄마가 자녀들을 다 품어 안듯이 안아주길 바란다. 아닌 것 같다. 이런 뒤틀린 관계의 문제 때문에 내가 계속 글을 써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종지부를 찍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계속 써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