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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트랄 Nov 08. 2024

소화불량 일기-4

Day 3. 누나의 밥상

정독도서관에 들렀다가 신문을 잠깐 읽고 있었다…가… 졸고 있는데 누나한테서 문자가 왔다.      


‘야, 나 오늘 갑자기 일이 조금 늦어져서 말인데 송연이 미술학원에서 좀 데려와 줄래?’     

‘^-.-^ 우쒸…’     

‘*^^* 잘생기고 멋진 동생아~ 부탁해~ 저녁에 울 집에 와서 갈비 먹자~’     

‘…그래’     


갈비땜에 해준다. 흐.


 저녁 섯 시 십 분. 너무 일찍 왔네. 송연이 수업이 끝나려면 십 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게다가 이 지지배는 비싼 미술 학원비를 아주 제대로 뽕을 뽑는다. 수업이 끝나도 한 이십 분은 기본적으로 지체하면서 이쁜 선생님들 퇴근을 늦게 만든다.


몇 번 데리고 오면서 송연이 작품을 봤지만 내 조카라서가 아니라 정말 그림 하나는 잘 그린다. 나처럼 잘하는 거 하나 없는 삼촌보다 훨 낫다. 나는 카페처럼 꾸며진 부모님 대기실에서 원두커피를 하나 뽑아 들고, 책도 한 권 집어서 대충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호~! 내 방망이를 받아랏~~~!!! 으하하하하하!!!”           

“악~~~ 하지마~~~!!!!!”     


갑자기 일곱 살 정도 된 남자아이가 자기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종이 방망이를 만들어서 휘두르면서 뛰어나온다. 동갑내기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향해 때리는 것 같은 시늉을 한다. 여자아이는 도망치며 소리치고 운다. 한참 동안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조용한 대기실이 시끄러워졌다. 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여긴 매번 이렇다니까.      


여자애가 울고 도망치는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남자아이의 방망이 위협은 더 심해진다. 그때 한쪽에서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여자아이 엄마가 나와서 딸을 다그친다.      


“얘가! 왜 이렇게 시끄러워!”     

“엄마~~ 형남이가~~ 방망이로 이렇게~~~ !!!”     


형남이라는 그 남자애는 벌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유, 몰라! 아무튼, 여기서 이렇게 시끄럽게 울지 마! 뚝!”     

엄마의 호통에, 그리고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모습에 아이는 더 서럽게 운다..

    

“엉엉엉~~ 으아아앙~~~~”     

“얼른 가자.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인사해야지!!”   


 아이 엄마는 어떻게든 울던 아이를 억지로 데리고 문밖을 나섰다. 조금 있다가 형남이 아빠가 나왔다. 아들에게 조그만 소리로 묻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남자아이는, 약간 어깨를 으쓱 해 보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빠도 더는 묻지 않는다. 그렇게 큰 소리로 한참 소란을 피웠는데. 아빠와 아들이 똑같다. 둘 다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서로 묻고, 모른다고 대답한다.  


 뭐, 적어도 형남이는 그때 그 버스 안에서 본 범수보다는 낫다. 하지만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가 느꼈을 공포를 그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아이는 단지 미술학원에서 시끄럽게 했다고,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혼내는 엄마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아까 형남이 아빠한테, 아들이 방망이로 장난한 것이 다른 아이를 무섭게 했다고 말할 걸 그랬다. 위액 분비가 살짝 많아진 듯하다.             

      


 

“누나, 나 왔어.”     

“응~ 우리 송연이 잘 데리고 왔지? 어서와~”     


 토끼 그림이 그려진 방수 재질의 보라색 앞치마를 입고 누나는 나를 맞이한다. 라디오는 항상 그렇듯 104.5에 맞춰놓았다. 원어민의 쏼라 쏼라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만 할 수 없다. 누나는 항상 “그래야 영어 한마디라도 더 익히지”라고 한다. 오늘은 누나가 기분이 좋은지 혼자 흥얼거린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폴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누나는 내가 오기 한 시간 전 전기밥솥에서 남은 밥을 퍼서 사발에 담아놓고 마르지 않게 랩을 씌워 놓았을 것이다. 내가 랩을 씌운 밥을 보고 이건 뭐냐고 하면 항상 ‘찬밥’이라고 한다.

랩 안쪽에 김이 서린 걸 보면 분명 찬밥 아니고 더운밥인데, 새 밥을 짓게 되면 그전 밥은 어김없이 ‘찬밥’이 되는 걸까? 밥이 많이 남았는데 왜 새로 하냐고 하면 누나는 매번 '네 매형이 원해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누나는 빈 밥솥을 깨끗이 씻어서 그 안에 한 바가지의 쌀을 붓고, 찬물을 붓고, 쌀을 씻었을 것이다. 여전히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동요의 한 구절을 변형해서 부르면서…     


“새 쌀을 붓고 씻어보자 샥샥~! 쌀알이 밭솥 에서 웃는다~~~”     


밥을 안치고, 냄비에 물을 부어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을 것이다. 국물 멸치를 대여섯 개 넣고 보통 불에서 뚜껑을 닫고 끓인 뒤, 십 분 정도 있다가 냄비뚜껑을 열면, 멸치가 끓는 물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 된다. 또 노래했겠지.      


“멸치를 넣고 끓여보자 팔팔~! 멸치가 국물 안에 춤춘다~~~~”     


누나는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상 차리는 건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누나가 채소를 씻고 주요리를 해 놓으면, 내가 상 차리는 걸 돕는다.      


“자~ 숟가락 놓고, 이거랑 저거 분리수거 통에 넣고…, 김치통 꺼내주고, 쌈장 떠 놔줄래?”


나는 오로지 갈비를 먹기 위해 누나가 시키는 일들을 아무 소리 않고 하나씩 완수해 간다.


“근데 매형은? 언제 와?”     


“응… 여덟 시쯤? 차려 놓고 있으면 오겠지!~”       


띠~리리~~ 띠리, 띠릿, 띠리리…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매형이 오셨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은 언제나 유효하다. 마침 EBS 라디오에서 프로그램 진행자가 쾌활한 목소리로 영어 퀴즈를 낸다.    


“Speak of the Devil”의 뜻이 뭘까요? 아시는 분은 샵 일 공 사오 또는 반디게시판, 카카오톡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물로 커피를 드립니다~!“       


“어이~ 처남 왔어? 오늘 또 우리 송연이 일일 보모네? ”     


서류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고, 매형은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약간 기분 나쁘네. 헐.    


 저녁 식탁에 앉았다. 매형과 나, 그리고 송연이가 자리에 앉으면 누나는 완벽하게 차린 임금님표 12첩 반상에 마지막으로 겨우 앉는다.


이제 몇 번 수저질과 젓가락질이 오가고, 매형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누나에게는 밥을 먹다 말고 다른 미션이 주어진다. 모자란 반찬 더 떠오기, 고기에 곁들일 초장과 쌈장, 기름장 더 만들어 오기, 상추와 고추, 깻잎 등 채소 추가하기.


게다가 메뉴가 매형의 맘에 들수록, 누나의 요리가 잘 되면 될수록 누나는 밥 한두 숟가락 뜬 뒤엔 여전히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마치 식당 아줌마가 된 듯 서빙을 해 댄다. 보다 못한 내가 일어나려 하면 매형은 눈에 힘을 주며 말한다.        


 “어허! 그냥 앉아있어!”      


그럴 때면 꼭 내가 일어나서 누나 일을 돕는 게 같은 남자로서 동지의식에 대한 배반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 된다. 아니. 사실은 배가 고프고 귀찮아서 그런 잠깐의 죄책감은 사라지고 만다.

      

 마침내 송연이가 먼저 다 먹고, 매형과 내가 식사를 마치면 식탁은 꼭 메뚜기 떼가 흩고 지나간 이집트의 형상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누나의 밥그릇과 국그릇엔 밥과 국이 반 이상 남아 있다. 매형은 ‘잘 먹었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신문지를 들고 거실로 가버린다.


이제 드디어 누나가 남은 밥을 먹을 차례다. 식탁엔 찌꺼기만 남은 밥그릇들과 국그릇들과 반찬 그릇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놓여있는 휴지들, 송연이가 먹다가 흘린 김칫국물과 밥풀이 보인다.      


 이제 누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미션은 하이에나처럼 들 먹고 남긴 밥과 반찬을 깨끗이 비워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환경보호에 일조했다는 뿌듯함을 가져가는 것뿐.


허겁지겁 남은 밥과 반찬을 혼자 앉아 먹고 있는 누나를 흘깃 바라보면서 나는 밥 먹기 전에 본, 누나가 랩을 씌워 놓은 '더운 김이 나는 찬밥'을 떠올린다. 지금의 누나의 모습이 딱 그렇다.


누나, 몇 년 뒤 비만은 둘째 치고 심각한 위경련이 일어날지도 몰라.


근데 나 이렇게 그냥 앉아있어도 되는 걸까? 누나를 이렇게 식당 종업원 취급해도 되는 걸까? 나 동생 맞는 걸까? 왜 나는 누나가 해주는 맛있는 갈비를 먹었는데도 소화가 잘 안 돼는 것 같은 걸까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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